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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옆에서
문석호 마더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017년 11월 07일 (화) 20:28:24 울산신문 webmaster@ulsanpress.net
   

필자는 시골출신이라서 공부를 위해 집에서 떠났던 적이 있다. 무엇이 되어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고향을 떠나 서울에 가서 고등학교 시절 객지생활을 했다. 그렇게 떠난 것이 오래전이고 서울에서 고향친구들을 만나곤 하는데 지난주 그 친구들 일부를 지방의 국화축제에서 만났다.

 그 친구들도 다 타지에서 공부를 했는데 제법 무엇이 되어서 돌아오기도 했고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도 있겠지만 모두들 고향을 떠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름대로 진로를 모색했던 친구들이다. 그때는 그렇게 떠났던 것이 떨렸던 꿈이었던 것도 몰랐던 때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여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가게 되고 아마도 고1 교과서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서정주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접하게 되었다. 그때의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첫 구절은 익히 알다시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시의 울림은 정말 큰 것이었다. 아 이런 세계가 있구나 꽃과 먹구름 속의 천둥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구나 하고 시 구절에 있는 말처럼 가슴이 조였다. 사실 우리들은 모두 꽃 한 송이를 피우자고 자기 인생을 떠맡아 그렇게 객지로 떠났던 것이 아닌가.

 하이데거 실존철학에서는 '무엇을 위함'이라는 연관맥락을 '사용사태 전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 도구들의 특수한 구조는 무엇을 위함이라는 연관맥락에 의해 구성되어 있게 된다. 망치는 못을 박기위하여 사용하며 못을 박기 위함이 그 용도인 것인데 그 망치에 결부되어있는 사용사태는 그 망치가 무엇인바 그것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현실적으로 벽을 생각할 때, 비록 주제적으로 파악되지는 않을지라도 애초부터 이미 거실이, 응접실이, 그리고 집이 벽의 전체로서 주어져 있는 것이고 전체성이 앞서 이해되고 있다. 벽은 말하자면 집을 위하여의 연관맥락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벽이나 의자 같은 존재자의 총합이 세계인 것은 아니다. 세계란 우리가 존재자를 총합해서 나온 결과라고 계산해낸 추후의 어떤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세계는 나중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밀한 의미로 앞서 있는 것이며, 미리부터 인간 안에 밝혀져 있는 것으로서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관계 맺으며 머물고 있는 '세계내부적' 존재자에로 소급해 올라가게 되는 그러한 것이다.

 의자는 인간처럼 '세계내존재'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 의자는 결코 세계를 갖고 있지 않다. 의자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이해하지도, 세계 내에 실존할 수도 없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가 지시하는 연관맥락은 결코 사물인 존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도무지 이해될 수가 없다. 소쩍새는 그냥 동물적 지저귐을 하였을 것이고 천둥은 그냥 먹구름 속에서 울렸을 것이다. 소쩍새가 그냥 지저귀고 천둥이 그냥 울려서는 국화꽃을 피워내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소쩍새가 인간 현존재에게 존재로 체험되었을 때만이 그와 일치하여  국화꽃을 피울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세계에서 국화꽃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만남의 울림을 젊은 시절 느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었던 젊음의 시절이었다. 그런 울림으로 세상에 나간 것이건만 세상에 빠져서 살다보면 그런 존재는 '삶'에서 망각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계라는 것이 너무 가까워 안 보이는 것이다. 존재자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것이 존재론적으로는 가장 멀다고 한 것은 하이데거다.

 무엇을 위한 삶이었단 말인가. 젊었을 때 들었던 '머언 젊음의 뒤안길'이라는 것은 체험된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던 말이다. 항상 올라가는 정상을 향한 삶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락의 길을 받아들여야 하는 '전락'이 숨겨져 있었다.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인제는 내가 누구인가를 ' 돌아와 거울 앞에'서 바라봐야 하는 시절이 와서야 거꾸로 알게 되는 길이 아닌가.

 사실 젊어서 우리는 세상에 나가 해야 하는 너무나 많은 숙제를 가지고 있다. 융 심리학에서는 '자아의 확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확장되면 근본적 '자기'로부터는 분리되고 '후반기 인생'에서 자기로의 재통합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가장 가까운 삶을 사느라고 가장 먼 뒤안길은 잊는 것이다. 사실 존재론적 세계의 이해란 먹구름을 안고 사는 인간이 현실에서의 체험을 한 뒤 그 자신에게 거꾸로 비쳐 보이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서정주시인의 삶이 시의 감동과는 다른 것이었듯 모두의 꿈의 실현은 젊은 시절의 그 열정을 잃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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