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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부 윤
하빈갤러리 실장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조금 여유롭다싶으면 이미 한 달이, 한 계절이 지나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난 것을 느낄 때는 알고 있던 지식과 현재가 다른 모습인 경우가 많다. 날이 갈수록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야 하고 기존의 지식은 옛것이 돼 그 가치가 변화된다. 지금부터 설명할 '한국화'의 시작도 기존의 것에서 변화돼 만들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양화'와 '한국화'의 차이점을 알지 못한다. 미술전공자도 둘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지루한 미술사를 줄줄 읊어댈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양화와 한국화는 구분할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진 단어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일제강점기부터다. 일제 강점기 동안 기존에 한반도에서 유지되고 있던 문화 대부분이 부정당했다. 그리고 일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그림양식만이 우선시 되고 높은 가치로 인정받았는데, 그것이 '서양화'다. 당시 일제는 자신들의 문화도 한창 서구화 시키던 중이었다. 서양에 대한 우월주의가 미술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 만들어진 단어가 '동양화'이다. 서양화는 주로 유화가 가장 대표적인데, 기존의 미술과는 너무나도 다른 미술기법, 미술도구 뿐 아니라 심지어 그림을 그리는 장소마저도 달랐다. 그래서 기존의 전통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은 자신의 미술에 이름을 붙이길, 서양화와 반대되는 동양화라고 지었다. 서양화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동양화라는 단어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조선에 자신들의 문화·예술을 퍼트렸다. 그중 미술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서양화와 동양화의 존재다. 당시 조선에서는 가장 큰 미술대회가 열렸다. '조선미전'이라 불리던 이 대회는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하고 있었다. 조선미전에서는 서양화만 심사하다가, 많은 예술인들의 요구에 동양화 항목도 만들어 심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술인들에겐 조선미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면 인생이 180도 바뀌는 수준의 상금과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미술인들이 참여를 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자기 입맛에 맞는 그림만 뽑았다.

 이 때 조선의 미술양식이 일본의 주도대로 바뀌어 간다. 미술인들이 조선미전에서 합격하는 미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유학을 떠나는 시기였다. 그리고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조선미전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자 많은 예술인들은 대회 대상작과 비슷한 구도, 색감으로 표현한 그림을 그렸다.

 광복과 함께 일본은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학하고 조선미전에서 수상한 사람들은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이들의 제자들이 그 양식을 계속 퍼트렸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조선미전에 참여 하지 않았던 미술인들이 하나의 단어를 만들었다. 그것이 '한국화'다. 한국화는 동양화라는 큰 범주에서 벗어나 일본과는 다른 한국만의 그림을 명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화라는 명칭이 자리를 잡기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동양화라는 명칭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굳이 한국화라는 단어 사용에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동양화와 한국화를 굳이 나누지 말자고 하는 이유 중에 동양화와 한국화의 입지자체가 너무나도 좁았기도 했다. 이는 광복 후에도 열렸던 조선미전에서도 알 수 있는데, 서양화 출품작 숫자와 동양화 출품작 숫자는 3:1 정도로 서양화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동양화를 나누려고 하니, 기존의 미술인들은 반발이 있었고, 한국화의 독립은 많이 늦어졌다.

 한국화가 만들어진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미술이 이어지다 다른 문화와 만나 점차 변화한 것이 아니라, 한국화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에 수입된 동양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동양화보다 한국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한국화의 정체성에는 아직 커다란 물음표가 달려 있다. 부모 잃은 아이가 안타까웠는지 많은 미술인들이 조선시대 미술을 복원하려 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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