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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형 석
울산대곡박물관장

울산은 학(鶴) 고을이었다. 그 시작은 신라 말까지 올라간다. 901년(효공왕 5) 학 두 마리가 금으로 된 신상을 물고 신두산에서 울었다. 계변천신이 학을 타고 신두산에 내려왔다고 한다. 박윤웅은 신학성(神鶴城) 장군으로 세력을 키워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다. 고려 성종은 울산에 학성(鶴城)이란 별호(別號)를 내려주었다.

 학은 울산 역사문화 곳곳에 스며있다. 울산의 관청 이름에는 '학'자가 들어간 것이 많다. 먼저 울산부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은 일학헌·반학헌이라 했다.

 일학헌(一鶴軒)은 1681년(숙종 7) 김수오 부사가 창건했다. 준공 후 김수오는 자신을 찾아온 아들 김호에게 건물 편액과 기문(記文)을 짓도록 했다. 그러나 김호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아버지 뜻을 받들지 못했다. 그 후 김호는 1695년(숙종 21) 울산부사로 부임해 왔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건물에 일학헌이란 편액을 걸고 기문을 지었다. '일학(一鶴)'은 울산 별호인 학성과 송나라 조열도(조변)가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 학 한 마리를 데려간 고사에서 따왔다. 김호는 조열도와 같은 청렴하고 강직한 관리를 꿈꾸었다. 그러나 부임한 지 한 달이 못돼 사망하고 말았다.

 1763년(영조 39) 홍익대 부사는 일학헌을 중창하고 이름을 반학헌(伴鶴軒)이라 고쳤다. 반학(伴鶴)은 학과 짝을 이룬다는 뜻이다. 현재 울산 동헌에는 이 때 관계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문서가 남아있으며, 반학헌 편액이 걸려 있다.

 동헌으로 들어가는 문은 가학루(駕鶴樓)라 불렸다. 그 이름은 계변천신이 학을 타고 신두산에 내려왔다는 설화와 관련이 있다. 현재 울산 중구청에서는 가학루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

 울산 객사 이름은 학성관(鶴城館)이었다. 이름은 울산의 별호인 학성에서 따왔다. 울산 객사는 옛 울산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었다. 객사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셨다. 중요한 날에 지방관과 관리가 여기에 배례했다. 객사는 공무로 출장 온 관리 숙소로, 유생 교육장 등으로 이용됐다. 객사는 동헌보다 격이 높았고, 건물도 훨씬 크고 웅장했다.

 조선 전기에 있던 울산 객사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1667년(현종 8) 유지립 부사가 중건했다. 울산 객사는 중심 건물인 학성관과 제승문·외대문(남문루: 태화루)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50여 칸에 달했다. 장대한 건물로 경상좌도에서 으뜸가는 객사라 불렸다. 이후 학성관은 화재 등으로 인하여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게 된다.

 1907년(광무 11) 학성관을 수리해 학교를 설치했다. 이것이 울산초등학교 전신인 울산공립보통학교이다. 울산 학생들은 지역에서 가장 격이 높은 건물에서 교육을 받았다. 졸업사진은 학성관 편액이 보이는 건물 앞에서 찍었다. 학성관은 울산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했다.

 일제는 1934년 학교 신식 건물과 공존하던 학성관 건물을 헐어버렸다. 학 고을의 상징인 학성관은 사라지게 되었다. 학성관이 헐리는 모습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은 필자의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최근 울산시는 울산초등학교를 옮기고 울산 객사 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학성관 유구를 확인했다.

 학성관 편액을 찾았으면 한다. 학성관의 남문루인 태화루(太和樓) 경우는 1940년 학교 운동장을 확장한다는 명분으로 헐리게 되면서 학성 이씨가 그 목재를 구입해 이휴정(二休亭)을 건립했다. 남문루에 걸려있던 태화루 편액은 학성이씨 월진문회에서 70년간 보관했다. 울산박물관이 건립될 때 그 편액을 기증했다. 2011년 울산박물관 개관 당시 전시되었으며 그것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태화루 사례에서 보면 학성관 편액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건물의 위상을 고려하면 철거 당시 누군가 편액을 챙겨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더 늦기 전에 학 고을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학성관의 편액을 찾아 학 고을의 의미를 되새기고 시민과 함께 활용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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