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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캄캄해진다. 소리는 새어나지 않지만, 간명한 보도기사의 이면에서 절규하는 인간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보도기사의 어조는 건조하다. 죽음조차도 담백하게 기술하는 냉담한 언어를 자꾸 들여다보다 보면, 마음조차 냉담해지는 것 같다. 어제의 보도기사에는 증권시장이 공황상태에 빠졌다는 내용이 있었다. 시장은 인간이 아닌데, 그것을 의인화하여 '인격권'을 부여하고 있는 듯한 표현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경제를 살리자'는 말의 뉘앙스 역시 동일하다. '사람'에 대한 상상할 수 없는 모욕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 사람들 그 자신이 염려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라는 유사 생물이다.


 이에 반해, 사람에 대한 세상의 태도는 무슨 '소모품' 바라보듯 냉담하고 경멸적이다. 노동자의 대칭어는 '사용자'다. 그런데 사용자라는 이 용어 속에서 노동자의 '인격권'을 유추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이 용어는 물건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가상각비를 증가시키면 폐기되듯, 노동자 역시 물건처럼 폐기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경제용어의 싸늘한 언어체계에서 '인간의 얼굴'은 숨 쉴 곳이 없다. 한때 이 땅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말이 유행한 바 있었지만, 물건 취급도 못 받는 오늘의 인간에게 '얼굴'이 있을 리 없다. '얼굴 없는 자본주의'는 야만이다. 인격에 대한 모욕을 당연시하는 추상적인 '경제'를 위해 인간은 어디까지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가.


 신문에서 기륭전자의 해고노동자들이 극한 자기표현의 상징으로 농성장에 '관'을 올려 보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50여 일에 걸친 단식도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지만, 목숨을 걸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분노로 등장한 이 '관'을 보면서 마음이 깜깜해졌다.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세상은 '비정규직 노동자'라 말한다.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 말 속에는 이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인격은 사라지고 없다. 그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이기 이전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어머니이며, 여성이다. 눈에 뻔히 보이는 사람의 고통을 같은 사람들이 방관해서는 안된다.


 또 다른 기사를 보니, KTX 여승무원들이 복직투쟁의 절망적인 한 방법으로 50m가 넘는 철탑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이들 역시 사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어머니의 외동딸이고, 어느 남동생의 누이이고, 어느 멋진 청년들의 애인들이다.


 그런데 비인격적인 기업이나 시장이 이들을 '대체가능'하다고 하는 주장에 너나없이 동의하는 것이 체질화된 사회가 있다면, 이는 사실상 병적인 상황이다. 인터넷 게시판의 어느 냉소적인 네티즌은 이들에 대한 기사의 댓글에서 이런 말을 적어놓고 있다. "기업의 존립근거는 이윤추구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사용자의 해고자유가 존재해야 한다." 이 시대의 '얼굴 없는 자본주의'는 이것을 상식이라고 말한다.


 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사람을 위해 기업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시장, 국가, 기업보다 사람의 가치가 우선해야 한다는 말을 냉소하는가. 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이윤보다 인격존중이 우선되는 사회가 돼야 한다라고 말할 용기가 없는가. 마치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피그말리온처럼 시장과 기업, 경제와 국가를 만든 것은 사람들 그 자신인데, 왜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발명품에 노예처럼 매몰되는 것을 당연시하는가.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모품 취급하듯 함부로 대하는 뒤틀린 주장과 이데올로기가 파상적으로 권유되면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그 자신의 존엄한 인격이 압살당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존이고 침범당할 수 없는 인격과 존엄의 확장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이라는 추상이 아니다. 비록 지금보다 덜 부유한 사회가 되더라도, 사람으로서의 존엄과 인격, 행복과 희망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좋은 미래다.


 기륭전자와 KTX의 해고노동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명하다. 어떻게 사람을 이리 모욕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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