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존엄성을 가짐은 누구도 부인 할 순 없지만 과연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는가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다. 스위스 등 일부 유럽국가 처럼 입법으로 그 권리의 인정여부를 정하여 두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결국 개개사건에서 인정여부를 법원의 판결로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형법의 경우 살인죄 편에서 촉탁, 승락에 의한 경우에도 살인죄의 성립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호흡기를 임의로 제거한 경우에도 형법상 살인죄로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美연방·韓 1, 2심 '인정'
 이러한 논의와 관련하여 미국전역을 떠들석하게 한 사례를 소개하고 최근에 우리 나라의 1, 2심에서 인정한 예가 있어 아울러 소개한다.


 미국 플로리다에 살던 테리시아보가 27세가 되던 1990년경 심장 발작으로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됨으로 심각한 두뇌손상을 입으면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이후 급식튜브에 의해 24시간 간병을 받으며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는데, 그 남편인 마이클은 아내가 생전 인공적 장치에 의해 연명되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현했다는 이유로 급식튜브를 제거해 달라고 주법원에 소송을 제기, 주 법원은 테리시아보가 회복불가능한 식물인간 상태이고 혼수 상태 이전의 의사를 존중하여 이를 허락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테리시아보의 부모는 마이클이 현재 다른 여자와 살고 있고 병원비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위와같은 소송을 제기하였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주장과 함께 '아'라고 하는 등 간단한 의성어를 표현하고 자신들을 보면서 가끔 미소를 짓기도 한다며 언제 깨어날지 모르므로 다시 급식튜브를 연결하여 달라고 재소송을 하였으나 위와같은 의성어나 미소는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근육의 경련 등으로 인한 것일 뿐이므로 이유없다며 판결했다.


 이로 인해 테리시아보가 죽음을 맞이할 위기에 처하자, 당시 주지사였던 부시 대통령의 동생 젭 부시가 위와 같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주지사의 명령으로 급식 튜브를 재연결할 수 있도록 명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어 시행함으로 인해 급식장치를 재연결했다. 그런데 이러한 법에 대하여 플로리다 대법원은 위 법은 삼권분립의 원칙을 위반한 무효라고 선언함으로 인해 다시 급식장치를 떼게 될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자 이번엔 부시 대통령이 연방차원에서 테리시아보를 보호하는 법을 만듦으로 인해 이사건은 연방차원의 소송으로 비화되어 전 미국인의 뜨거운 토론을 유발했다. 그러나 테리의 부모나 부시 대통령 형제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방대법원은 급식장치를 떼도록 명하였고 이를 뗀 후 13일만에 테리는 사망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모씨가 1997년 화장실에 가다 넘어져 뇌수술을 하면서 그 후유증으로 자가호흡을 할 수 없어 호흡보조장치를 부착한 채 치료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모씨의 가족들이 치료비 등을 이유로 퇴원을 요구했고 이에 주치의가 퇴원시 곧 사망한다는 설명을 하면서 만류를 하였으나 퇴원을 고집하여 주치의가 퇴원을 허락하고 이로 인해 모씨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하여 주치의에 대하여 살인방조죄를 적용하여 처벌했다.


 그런데 서울 고등법원은 올해 뇌사상태에 빠진 김모씨와 그 자녀들이 신촌세브란스 병원을 상대로 낸 무의미한 연명치료장치제거 등 청구 소송에서 1심에 이어 이를 받아 들임으로서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의 생명은 최대한 보호되어야 하므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보호,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를 다할 의무가 있지만, 그렇다고 항상 가능한 모든 의술을 사용해 봐야 한다거나 꺼져가는 생명을 어떤 수단을 동원하여 연장시켜야 한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물학적인 의미의 생명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 역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보호되어야 하며 의학적으로 무용한 처치를 계속 받도록 강제하는 경우 오히려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생불가 죽음연장 옳을까
 물론 회복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분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중시하는 미풍양속을 생각한다면 위 판결에 대하여 반대하며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에 대한 사법살인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일생을 살다가 회생할 수 없는 죽음의 터널에 들어선 상태임에도 의술의 발달로 그 터널의 길이만 무한정 늘리는 것이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인 것 같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