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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처럼 얇은 책이다. 우윳빛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 손끝으로 새로운 감각이 전해져온다. 초콜릿 케이크와 대화를 나누다니, 기가 막힌 상상인 걸! 나를 둘러싼 공기가 새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예상치 못한 깊이의 슬픔과 마주하게 된다.
주인공 아이의 생일날, 소방차 운전사인 아빠와 소방용 호스 도끼 전문가인 엄마는 저녁 식사를 하다말고 집을 나선다. 엄마아빠의 직업 때문에 아이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아이가 혼자 케이크를 꺼내 나이프로 케이크 위쪽을 찌르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린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물론 초콜릿 케이크가 한 말이다.
"혹시 나를 먹을 생각이라면 꿈 깨는 게 좋을 걸!"
케이크의 거만한 자세가 마음에 안 든 아이는 진실을 깨닫게 해주려고 생각한다.
"너는 먹으라고 만들어진 걸. 케이크는 먹는 거잖아"
"난 싫어. 난 다른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나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마음이 울렁거렸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은 케이크라니! 우습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다. 다른 것이 되고 싶다는 갈망을 품는 순간 고통이 시작된다는 걸 안다. 현실의 자아와 꿈꾸는 자아의 간극에서 기쁨과 슬픔의 롤러코스터가 작동된다.
아이가 비행기 조종사가 되려면 학교 졸업장이 필요하다고 하자, 초콜릿 케이크는 항의하듯 말한다.
"불공평해. 나는 학교에 가 본 적도 없는 걸. 내 운명은 벌써 정해져 버린 거구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아이는 케이크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케이크의 슬픔과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가만히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의 슬픔과 외로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대화는 이렇게 힘이 세고 우리를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갈 수가 있다.
케이크는 결국 자기의 미래가 유쾌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곰팡이 냄새나는 건 참을 수 없고, 몸이 썩어가는 건 더 없이 슬프다고 말한다.
"다른 방법이 없어. 너는 나를 먹어야 해"
"넌 이제 내 친구인 걸. 난 널 먹고 싶지 않아"
아이는 결국 케이크가 원하는 대로 나이프를 내려놓고, 양치를 깨끗이 하고, 왕관처럼 초를 하나만 꽂고, 슈베르트의 음악을 틀어놓고 최선을 다해 다정하게 케이크를 베어 문다.
 

임순옥 아동문학가
임순옥 아동문학가

새로운 해를 시작하며 우리는 저마다 새로운 존재가 되기를 꿈꾼다. 결국에 변신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아이가 케이크에게 한 말처럼 우리가 꾸고 있는 꿈이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갈 것이다. 다른 것이 되기를 꿈꾸는 세상의 많은 존재들이 누군가와 소통하며 외로움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초콜릿 케이크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슈베르트의 음악을 틀어본다.
작고 무뚝뚝하고 낯선 존재에게 마음을 내려놓고 귀를 열어본다면 아이를 훌쩍 뛰어넘은 우리들에게 초콜릿 케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올지도. 임순옥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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