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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UN)이 2017년에 발표한 국가별 행복지수를 보면 상위권을 차지한 나라들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등 서구 유럽의 복지국가들이었고, 우리나라는 155개 국가 중 56위로 나타났다. 행복지수를 나타내는 요소들로는 1인당 GDP, 건강한 기대여명, 사회적 지원, 자기 삶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만족도, 관용, 사회적 신뢰 등 6가지를 들고 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빠른 속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우리나라는 지금 물질의 충족이 결코 행복을 가져 다 주지는 못한다는 명제를 뼈져리게 느끼고 있다. 인간 존중의 전통적인 가치관은 점점 멀어져가고, 젊은이들은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으며, 결과 중심적이고 권위적인 조직문화는 열정과 자발적 참여 의식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불가(佛家)에서는 중생의 고통은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생각인 아집(我執)에서 나오고, 깨달음을 얻은 보살(菩薩)의 고통은 깨달음에 집착하는 법집(法執)에서 나온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깨닫지 못한 중생도, 깨달음을 얻은 보살도 무엇이든지 붙잡고 있는 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붙잡고 있었는지 이제는 돌이켜 보아야 할 때인 것 같다.

가장 소중한 가치인 사람은 뒤로 한 채, 경쟁과 물질만능주의만을 앞장세운 결과가 자살률 세계 1위의 오명을 뒤집어 쓴 오늘의 비참한 결과를 낳지 않았는지 이제는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TV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우리나라의 모 대기업의 조직문화를 다룬 프로가 있었다. 정말 낯 뜨거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인 천박한 인격의 조직은 반드시 무너지고야 마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 가.

그냥 빠르게만 지은 집이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인간관계가 단절된 곳은 구성원 간에 아무런 배려가 없다.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이웃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생각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인격자들이 모인 사회는 행복지수 요인인 사회적 지원, 자기 삶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만족도, 관용, 사회적 신뢰가 높아지고, 부(富)와 장수(長壽)로 결코 이룰 수 없는 행복에 다다르게 된다.

퇴계 이황 선생은 교육의 목표를 '무소위행(無所爲行)'에 두었다. 인간이 꾀함이 없는 행동, 순수한 행동을 하게 될 때 비로소 인격 완성의 길에 이른다는 뜻이다. 사심(私心)을 가진 헛된 욕망은 자신과 이웃을 해하는 비극을 낳을 뿐이다. 퇴계 선생은 이 비극의 원인이 우리의 물든 마음, 나와 남이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착각에서 비롯됨을 간파하였다. 19세에 오도송(悟道頌)을 읊은 대유학자다운 통찰력이다.

오늘 우리가 퇴계 선생과 같은 초월한 인격자가 되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제도를 인격도야(人格陶冶)가 포함된 전인교육(全人敎育)으로 바꾸고, 인간을 수단으로 삼고, 일방적 명령만이 존재하는 경직되고 마비된 병든 조직 문화를 바꾸는 일은 우리의 결단에 달린 일이다.

몇 달 전 통계 강의를 위해 어느 중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보았던 어린 학생들의 순전한 눈망울, 천진스레 장난치던 모습들이 지금도 내 가슴을 아프게 울린다. 저 아이들에게 만은 기성세대의 권위적인 문화를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결단을 우리 울산 시민들부터 했으면 한다. 2018년 무술년(戊戌年)의 '戊'가 광활한 대지를 뜻하듯이, 올해는 넓은 운동장을 마음껏 달리는 누렁개와 같이 신명나는 한 해가 되어 행복지수 1위의 대한민국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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