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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 주변

이자영

섬유질만 남은 나뭇잎처럼
나로부터 철저히 증발하는 지점
이토록 마알간 공기가 또 있었을까
오래된 습관처럼 바람도 그저
징표 같은 흔적 하나 찍었을 뿐인데
야릇한 숫자판 앞에서 사람들은
나잇값이니 나잇살이니 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셈법을 끌어댄다
백년도 못 살 거면서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산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열쇠가
꾸러미에 잔뜩 달려있다
마지막 녹슨 열쇠가 자물쇠를 열 것이다
나는 성찬을 대하듯 흔감을 다하며
또 그렇게 나이를 먹을 것이다

△이자영 시인: 1984년 '개천예술제' 문학신인상 등단, 대한민국우수방송문화예술인 선정 청와대초빙(1984), 녹색 시인상, 박재삼 문학상, 울산 문학상, 울산 시인상 외 수상, 시집 '꽃다발 아니고 다발꽃' 외 5권
 

박진한 시인
박진한 시인

시를 소개한다는 것은 시인의 명상 시공간으로 잠깐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연륜의 시를 시론으론 평할 수는 없기에 그냥 읽고 가슴 속으로 접어든 한 줄기 빛으로 얼어붙은 겨울을 녹여 봄동 같은 채소에 달콤한 봄을 부르는 양념을 살짝 묻혀봅니다.
그 언젠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겨우 몇 밤을 자고 나니 훌쩍 낙엽이 쌓여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인간이기에 보내버린 현실의 지점에서 되돌아봄으로써 시인은 아직이라는 무한의 힘으로 내일의 열쇠꾸러미를 잡는 가 봅니다.
난 아직도 반성과 후회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돌이켜보고 깨달아 본다는 것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 같아 혼돈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또 각성이니 자각이니 하는 단어는 때론 심오한 종교인이나 하는 소리 같아서 그냥 잊어버리고 살지만 모르는 사이에 심장을 둘러싼 심포를 당기고 있습니다.
심장이 뜁니다. 느린 안단테가 빠른 알레그로로 뜁니다. 아니 아직도 남은 열쇠꾸러미가 뜁니다. 그 누군가 숫자에 밝지 않으면 전(錢)은 증발한다고 했습니다만 시인은 "백 년도 못 살 거면서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산다"라며 초월을 불러 뛰어 넘겨 버렸습니다. 시인이기에.  
새해 한 달 나이테 직감으로 또 반성과 후회를 불러봅니다. 박진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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