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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경기는 그냥 스포츠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할 것이다. 올림픽은 커다란 문화적인 행사이며 스포츠 관계자 외에 많은 정치, 문화, 경제인들이 우리나라를 찾는다.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에서 올림포스 산에 있는 신들에게 바쳐진 신성한 게임이었다. 그때도 4년마다 대제(大祭)때에 경기가 열렸던 것으로 인간을 위한 경기가 아니었다. 신에게 바쳐진 인간들의 경쟁스포츠였다는 것인데 그 경쟁을 왜 신에게 바쳐야 했던 것인가.

지난 1월19일부터 22일까지 '세계의 젊은 작가들, 평창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다'라는 국제 인문포럼이 열렸다. 우리 작가들 그리고 세계의 여러 곳에서의 작가들이 참여해 주제 발표도하고 토론도 하는 모습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필자에게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곳에 실린 여러 글들이  흥미로운 것이었는데 그 중에는 알렉산드르 강이라는 북한 평양 태생 러시아 작가의 글도 보였다. 구소련 고려인들의 강제이주를 다루고 있었으며, 문학의 안식처로서의 역할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었다. 필자가 이해하는 바로는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 그곳에서 자신의 체험을 재정비하여 창조에 이를 수 있나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포럼의 기획위원장인 방민호 교수의 '함경북도 길주'라는 글은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것인데, 북한 함경북도 길주에서는 지금까지  여섯 번에 걸쳐 지하 핵실험이 일어나고 있으며, 길주 주민들이 피복증상을 나타낸다는 보도를 인용하면서, 한반도가 삶의 터전으로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반도를 핵의 위험에서 구제할 수 있는 방도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모아보자고 하면서 북쪽 남쪽 사람들 모두 힘을 합하여 한반도의 분단과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생각을 창조해야 한다고 끝을 맺고 있다.

평화의 제전에서 어떻게 하면 대립과 갈등을 화해와 융합으로 이끌 것이냐를 말하는 것인데, 어쩌면 올림픽이라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그런 양극단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에로 바쳐지는 신성한 제의(ritual)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양극은 신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통합하는 것이 신성한 이유이고 그런 신성함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성화가 마련된 것이 아닌가.

그 성화가 경기가 이루어지는 주경기장으로 봉송되어 경기기간 동안 불타오름으로서 분위기를 고조시키게 된다. 신에게 바쳐지는 신성한 행위로서 경쟁에 참여하는 것이며 상대와 게임을 놓고 하나가 된다. 자신이 승리하면 상대는 패배를 할 것이고 자신이 패배하면 상대는 승리를 할 것이다. 누구도 패배를 원하지 않을 것인데, 경쟁과정에서 우리 모두는 성공과 실패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승리와 패배를 통하여 우리는 승리나 패배 하나만 가지고는 결코 신 앞에 온전한 자신을 바칠 수가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리스 시대에는 신들이 생생하게 사람들 사이에 있었고, 사람들은 주위 환경에서 대상에 대하여 심리학에서 말하는 '신비적 참여'를 하던 때라는 생각이 든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도 국가는 자식과 처를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말일 수 있지만 세계와 내가 하나라면 같이 공유하지 못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자기 자신과 주위 대상에 경계가 없었다. 자신의 경험과 그가 경험한 세계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스포츠에서 선수를 동일시하면 그 선수가 이긴 것이 내가 이긴 것이 되는 이유이다.

성화가 타오르는 이 신성한 경기장에서 이미 나는 위대한 전사이다. 나는 그냥 소외된 외톨이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도 안 된다. 대상에로 투영시켰던 것을 바깥에서 되돌려 와서 '나'를 찾을 수 있는 투철한 인식이 필요하다. 세계와 나는 다른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 투사한 것이 나라고 착각했던 나를 넘어서는 '자기'일 수 있는 것이고 자기와 동일시하는 그 팽창을 거두는 것도 진정한 '나'를 찾는데 필요하다.

세계와 나는 나의 '실존'에서 본래적 자기이해에로 나아가는데 있어 서로 보완되어야 하는 중요한 주제라는 생각을 한다. 알렉산드르 강의 경우 그 사회에서 개인이 희생되면서 상처를 받고 그 고통 속에서도 문학이 그의 안식처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 안식처와 요나에 대한 신화를 대응시키는데, 고래에 먹힌 요나의 상태와 같은 폐쇄된 공간이 자기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자신의 내적 세계가 된다. 고통과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 곁에는 빛과 환희도 있다.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와 패배가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겐 그 통합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고, 신에게 바쳐지는 것이 바로 이 깨달음 인 것이 아닌가. 모두가 승리를 위하여 전력 질주하고 있는 이 소진의 시대에 올림픽 정신이 무엇이었던가를 다시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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