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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거의 모든 미술관 전시실은 넓고 하얀 벽이다. 뉴욕 현대미술관 전시실도 높고 흰 벽으로 되어있다. 둥근 모습을 가진 구겐하임미술관, 심지어 화력발전소를 개축해서 만든 테이트모던 미술관까지 거의 비슷한 전시실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세상에 단 14년 동안만 존재했던 독일의 작은 대학 때문이다. 오늘날 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대표적 상징을 만들 수 있는 힘을 제공한 이 대학은 건축과 예술은 물론이고 우리 일상용품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원통형 커피포트와 반달형 탁상램프, 포크와 나이프의 기본적인 디자인은 이 학교 학생들 작품이었다. 약간씩 변형되었지만 이들 디자인 느낌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유감이지만, 우리나라 대학들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이 대학의 설립이념과 조형이념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이 대학은 1919년에 설립된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BAUHAUS)이다.

 

발터 그로피우스, 바우하우스 학교, 독일 데사우, 1925~1926
발터 그로피우스, 바우하우스 학교, 독일 데사우, 1925~1926


독일제 산업품이 실용적이고 세련되면서 튼튼한 물건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 배경에는 바우하우스 때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어쨌든 이 학교는 요즘 구조조정으로 만든 학과구분이 거의 없는 통합미술대학쯤 된다. 14년 동안만 학생을 가르치던 대학이 디자인개념을 만들고, 현대디자인이라는 방향까지 제시하고, 모더니즘 미술과 사상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리하면 혁신적 설립이념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혁신적인 사고를 가진 선생을 채용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창조적 능력을 키웠던 학생들 때문이다. 그리고 1933년 폐교된 이후에도 이 학교에 재직했던 선생과 제자들이 서로 가르치고 배웠던 이념을 유럽과 미국에서 실천하고 전파해나갔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예술의지와 철저한 기술연습(일대일로 기술을 전수하는 도제식)으로 터득했던 공예기술은 그들의 신념과 작품들에 표현되어 20세기 예술과 문화를 바우하우스 이전과 이후를 확실하게 바꾸어 버렸다.    

이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배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이런 혁명의지는 1919년 괴테와 실러의 고향이었던 바이마르에서 헌법을 제정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으로 드러났다. 영국의 윌리암 모리스의 '아트 앤 크라프트' 운동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던 독일은 '작센 대공 미술학교'와 '작센 대공 공예학교'를 통합한 대학을 설립하고, 학장직을 그로피우스에게 맡겼다. 건축가였던 그는 독일공작연맹이 추구하던 이념으로는 암울한 독일을 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미술학교의 이론과 공예학교의 기술을 결합하여 기술을 가진 예술인을 양성해서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직업으로 예술은 없다. 예술가란 지위가 높은 기술공일 뿐이다. 예술가와 기술자 사이의 높은 장벽을 없애야 한다. 앞으로는 건축과 회화, 조각, 공예가 하나로 결합될 것이다. 이런 모든 활동의 마지막 목표는 바로 건축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학교이름도 바우하우스(건축을 위한 집이라는 뜻)로 지은 것이다. 그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학교건물(1926년)은 지금 눈으로는 얼핏 단순한 건물이지만 당시로는 현대건축의 방향과 그 모범을 보여준 것이었다.

바우하우스 건물을 미술학교답게 필요한 디자인과 제작을 거의 직접 시행했다. 건물 내부의 인테리어 벽화는 벽화공방이 맡았다. 조명기구의 디자인과 설치는 금속공방이, 강당, 식당, 작업실의 강관(스틸 파이프)으로 만든 것들은 교수였던 마르셀 브로이어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들이다. 글씨디자인은 바우하우스의 인쇄 공방이 했다. 지금이야 이런 방식으로 건축을 하면 법적논란이 생길 일지만, 그때에는 가장 혁신적이고 실질적인 교육방법이였다. 살아있는 교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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