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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떤 사물에 대해 '아이'라는 말을 잘도 갖다 붙인다는 걸 느낀다. 애완동물은 물론이고 꽃에도, 옷에도, 어떤 공산품에까지 구별 없이 붙이는 걸 예사로 본다. 옳지 않은 말인 줄 잘 알 텐데 여기저기서 어렵잖게 듣게 되어 불편하건만, 언젠가부터 내 안에서도 '마음 아이' 하나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가 어려워 생긴 신조어 중에 '헬조선'이란 말이 있다. 지옥을 뜻하는 'hell'과 '조선'을 합해서 만든 말이다. 신분 사회였던 조선처럼 소득 수준에 따라 신분이 굳어져 가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비판하면서 만든 말이란다. 이를테면 약간 삐딱한 시각으로 본다면 '지옥불반도'니 '망한민국'이니 하는 요상한 말과도 통하는 용어다.

총체적 난국이라 일컫는 이 시대의 흐름이나 현상으로 볼 때, 헬조선이라는 말에 딴지를 걸면 뭔지 모를 낙인이 찍힐 것 같다. 자칫하면 '그래 너 잘났다'는 손가락질을 받게 될까 봐 염려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헬조선의 반대 기치를 들고 대한민국 국민답게,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데 의의를 두고 가슴 속에 긍정의 마음 아이 하나 키워 보면 어떨까? 헬조선이라는 몹쓸 나라에 사는 것과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이 분명한 나라에 사는 것 중 내 나라라고 솔직히 주장하고픈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지 조심스레 묻고 싶다.

세상 모든 게 내 탓은 없고 남의 탓 사회 탓인 듯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어두운 곳에만 사는 은둔자 꼴을 한 박쥐같았다. 깜깜한 벽에 거꾸로 매달려 도무지 내 인생에 볕 들 날이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가 있다면 그야말로 지옥불반도보다 더한 세상이라고 떠들고 다닐지 모른다. 지긋지긋하게 싫은 헬조선 안에 사는 한 사람으로 아직도 불만 속에서도 허덕대고 있을지 모르겠다.

당시, 내가 살던 환경은 나를 둘러싸고 사는 주위 사람들과 특별히 다를 것도 없었다. 발품 새가 대단히 넓어 어느 부잣집 자식을 알아 비교를 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또래들보다, 주위 사람들보다 나만 재수 없이 힘들고 어렵게 사는 것 같아 늘 불만스러웠다. 그간 산 경험 치로 되짚어 생각해보니 지금 키우고 있는 '마음 아이'를 잘 못 다스린 결과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는 우리나라를, 이 사회를 비하하는 은어나 비속어를 보면 내 마음을 대신 알아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시위 문구나 그 시대를 탓하는 각종 언론을 대할 때는 나를 위해 제작된 것 이기라도 한 양 울증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행복은 어느 누가 가져다주지도, 어떤 형태로 살아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구분할 줄도 몰랐다. 그 누가 말해 주지도 않았지만, 가르쳐 준다 해도 귀를 닫고 살았기에 들리지도 않았다. 언감생심, 행복이란 낱말은 나와는 상관없는, 특별히 발췌해야 할 말처럼 낯설었다. 오직 내 마음만이 나를 변하게 한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지나서였다. 돌이켜보면 나 아닌 누군가가, 무엇인지가 나를 자꾸 부리려 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삐뚤어져 가는 나를 방치한 채 외면만 하다가 지쳤다 싶을 때쯤, 낡은 책장에 늘 꽂혀있던 명상록이 눈에 들어왔다.

책 내용의 속뜻은 모두 내 마음이 나를 조종한다는 것이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턱없이 불만했던 나의 과오를 깨닫게 됐다. 순간, 애초 내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란 것도 알면서 주제넘게 부린 욕심의 높이를 줄여 볼 작정을 했다. 자신을 치올리려 애쓰기보다 낮춤으로, 본래 그대로를 인정하면서 편해져 보자고 마음 아이를 달랬다.

언젠가 부터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도 귀에 들어왔다. 그 말이 나의 도피처가 되었다. 변명 같지만 그 말에 기대어 닥친 일에 버거워하기보다 그 안에 젖어 들기로 했다. 그럴 때마다 독백처럼 되뇌었다. '그래 즐겨보는 거다,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랴?' 하고. 억지로 먹은 마음이었어도 그대로 해결하려 했을 때 마음이 편해지는 게 희한했다.

나를 부리는 건 내 마음이다, 곧 그 마음이 나의 주인이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 예쁘고 좋다고 보면 마음이 편편하다. 다를 것 없는 상황인데도 반대로 보면 밉고 싫다. 그때 표출되는 마음은 비포장도로를 걷듯 울퉁불퉁 닮은꼴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3월이다. 자신을 예사로 대했던 이가 있다면 시작에 앞서 자기애를 더 가져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방법으로 자신의 영혼 속에 든, 형체 없는 마음에 '아이'라는 이름을 붙여보면 어떨까? 아이라는 이름을 붙여 의인화한 대상은 다 어여뻐하는 것들이다. 각자 잘 생긴 '마음 아이'를 키워 자신감을 갖고 용기 내길 바라본다.

어느 고전학자는 마음을 다스리는 글에서 '겸손은 나를 높여주는 낮춤의 자세'라고 했다. 마음 아이를 잘 다스려서 더 겸손해질 수 있도록 욕심을 낮춰 볼 일이다.
오늘도 마음 아이는 계속 훈련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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