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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92개국에서 약 삼천 명의 선수들이 참여하여 저마다의 기량을 선보이고 돌아갔다. 웃고 즐기는 사이, 정해진 시간은 끝이 났지만, 최선을 다하던 선수들의 모습은 머리에서 쉬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이번 올림픽 경기가 훈훈했던 건, 스포츠 정신을 실천한 선수들의 참모습 때문이 아닌가 싶다. 메달에 가치를 두는 승리를 위한 참여가 아니라 노력하는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두는 선수들 모습에서 올림픽의 순수한 목적과 정신이 제대로 실현되었음을 실감한다. 

메달을 따지 못해도 환한 얼굴로 돌아가는 선수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 해마다 열렸던 가을 운동회가 떠올랐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턱없이 키가 작았다. 거기다 운동에는 소질이 없어 죽어라 달려도 낙엽 줄을 면하기 어려웠다. 손등에 일, 이, 삼, 순위를 가르는 도장을 받는 친구들을 보면 허탈해지는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삼 학년 무렵의 운동회 날이었다. 삼 남매가 나란히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사부자 이어달리기'라는 종목에 출전할 기회를 얻었다. 오빠와 나, 동생, 그리고 아버지를 포함한 네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사백 미터 계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자그마한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훤칠한 아버지였다.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걸이를 보아 승산을 걸어도 될 성싶었다. 

우리는 다른 어느 게임보다 가족이 함께 하는 달리기 시합에 의지를 불태웠다. 어머니도 선수 입장 직전까지 삶은 달걀을 먹이는 것으로 아들딸을 응원했다. 달걀로 든든해진 뱃심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껏 충천하던 기세에 불을 지폈다. 가슴에는 꼭 일등을 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솟구쳐 올랐다.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없었던 우리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우리 팀은 아버지를 마지막 주자로 정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다른 팀도 대부분 어른이 마지막 주자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다른 선수들보다 크고 날렵하신 아버지가 계시니 일등은 따 놓은 당상이라 여겼다. 바통 순서를 정하고 바지 고무줄을 단단히 추켜올렸다. 

목이 터지라 응원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힘입어 물살을 가르듯 달렸다. 동생이 건네준 바통을 잘 받은 나는 한 사람을 추월하고 여섯 명의 선수 중 두 번째로 골인했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펄럭이는 오색 만국기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오빠를 응원했다. 살짝 밀리는가 싶더니 두 번째 자리를 지켜낸 오빠는 마지막 바통을 아버지에게 넘겼다. 한결 여유로워진 아버지를 향해 갈채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이변이 일어나고 말았다. 

2등으로 달리던 아버지는 
뒤에서 달리던 선수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반칙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만 달렸어도 최소한 이등이 아닌가. 아버지는 뒤에서 달리던 선수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반칙하는 것을 보고 그 선수를 따라잡기 위해 레인을 이탈하고 말았다. 지르던 환호성을 어떻게 갈무리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받아 놓은 밥상이 날아가 버렸다. 골인 지점을 향해 달리는 아버지는 어린 우리 눈에도 제대로 지고 있었다. 정당하지 못한 승리는 민망함과 허탈감만 안겨주었다. 이기고야 말겠다는 순간의 욕심에 눈이 멀었던 우리 가족은 아예 순위에서 실격 처리되었다. 

정당한 꼴찌가 부정한 일등보다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그날 이후 운동회 날이 오면 승패에 연연하기보다 온 가족이 합심하는 기회로 삼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두고두고 도마 위에 올랐지만, 우리는 상보다 더 귀한 교훈을 얻었다.

간혹 스포츠 정신을 무너뜨리는 올림픽 선수들의 행동이 도마 위에 오른다. 그때마다 한바탕 해프닝으로 남아있는 유년의 기억을 되새김한다. 올림픽에서 메달보다 중요한 건 공존과 화합이다. 몸이든 마음이든,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위로를 건네고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올림픽의 정신이 아닐까. 라이벌에게 다가가 포옹하고 악수로 격려하는 스포츠인의 모습에서 남과 북이 하나 되어 손에 손을 맞잡는 통일의 날을 꿈꾸었다면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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