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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월요일이 사라졌다>라는 영화를 보았다. 제목을 보면 월요병에 걸린 샐러리맨의 바람을 영화화한 건가 싶은데, 실제 내용은 암울한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일종의 SF 영화이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물과 식량, 자원 등이 부족해지자 1가구 1자녀로 산아제한을 실시하고, 다른 자녀들은 이런 문제들이 해결된 뒷날에 깨어나게 냉동장치에 넣는 미래 어느 시대가 배경인데, 이 와중에 일곱 쌍둥이가 태어나고 할아버지는 쌍둥이 자매들에게 일주일의 이름을 붙여 몰래 키운다. 그녀들은 자신의 이름과 같은 요일에만 외출하며, 밖에서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카렌 셋맨이란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극심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그런대로 잘 지내던 자매들은 어느 날 월요일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서 심각한 위험에 노출된다. 뒤로 갈수록 액션 활극으로 변하고, 암울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끝나버리지만 소재만큼은 기발하고 흥미로웠다.


이와는 정 반대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 사회가 배경인 영화도 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이 그러한데, 전 세계 모든 여성들이 임신 기능을 상실하고 세상은 무정부 상태의 혼돈에 빠진 가운데 기적처럼 임신을 한 여성과 그 아기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이다.

두 영화는 출산의 문제 외에도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인구폭발로 극단적인 산아제한을 실시하는 쪽은 감시와 통제가 만연하여 일거수일투족이 중앙에 보고되는, 빅브라더 같은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모든 여성이 불임에 빠진 쪽은 각 나라가 정부의 기능을 상실하여 테러와 폭동이 난무한다. 감시와 통제든 테러와 폭동의 무정부 상황이든 모두 음울하고 끔찍한 디스토피아적 세계이다. 어떤 영화들은 종종 예언적으로 미래의 모습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예컨대 가상화폐나 가상현실, 인공지능 등, 그래서 이런 디스토피아적 영화를 보고나면 무언가 불편하고 찝찝한 기분이 든다. 이것은 정말 인류의 미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인가? 만약 우리가 맞닥뜨릴 미래의 모습을 영화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어느 쪽에 가까울까? 혹은 두 가지 상황 가운데 어쩔 수 없이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편을 들어줄 것인가.

우리나라의 경우, 저출산이 만성화되어 인구절벽을 걱정해야 할 판이고, <칠드런 오브 맨>이 2027년, 불과 10년 뒤의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 아무래도 그 영화가 표현한 세계의 모습에 관심이 간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보건데 실제는 몸속의 칩 안에 모든 정보가 저장되어 터치스크린으로 보여 지는, 카렌 셋맨이 살아가는 세상이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아니, 또 다시,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피의 학살, 쿠르드족과 로힝야족 문제, 탈레반과 IS  등을 보면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 인류의 미래 모습은 아닌가 우려되기도 한다. 물론 두 영화에서 그려지는 세상이 한꺼번에 펼쳐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옥 중의 지옥일 것이다.

다만 어느 영화든 희망의 순간은 보여준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아기가 나타나자 군인들은 잠시 살육을 멈추고 경이로운 눈으로 아기를 바라보며 길을 비켜준다. <월요일이 사라졌다>에도 인공 자궁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 받고 있는 쌍둥이의 모습이 나온다. 심지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태양풍으로 지구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 재난 영화 <노잉>에서도 신적인 존재의 도움으로 두 남녀 아이는 안전한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게 된다.

근래에 감상한 여러 영화 가운데 이 두 영화를 문득 떠올린 것은 요즘 들어 부쩍 저출산을 우려하는 기사들이 눈에 띈 때문인 듯하다. 물론 오래된 아파트라 노인인구가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아파트 만해도 아기를 보기 어렵다. 동네에서 유모차를 만나는 경우도 드물다. 척박한 땅의 소나무가 솔방울을 잔뜩 매달듯 생육 환경이 나빠지면 식물은 열매를 많이 맺어 씨앗을 퍼뜨리려 하지만,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결혼을 포기하거나 출산을 미룬다. 출산을 미루는 일이 기성세대 눈에는 저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려는 이기적인 행태로 비추어질지 몰라도, 젊은 세대에게는 인간의 본능까지 억누르는 힘든 결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회에서든 아이는 여전히 희망의 상징이다. 듣기 좋은 소리 세 가지로 흔히 갓난아기 목에 젖 넘어가는 소리,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아이가 글 읽는 소리를 꼽는데, 이중 두 가지가 아이와 관련된 소리이다. 아무리 인간과 흡사한 로봇이 개발되고, 실제와 구분하기 어려운 가상현실이 펼쳐진다 해도 정말 진짜인 사람과 같을까. 인류의 유전자를 남긴다는 것이 언젠가는 절체절명의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칠드런 오브 맨>의 마지막 장면에서 최후의 아기를 안전한 장소로 데려갈 배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하게 된다. 아기의 숨은 꺼뜨리면 안 되는 프로메테우스의 불과도 같은 것이므로.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잠시 잊거나 그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암울하고 절망스러운 미래를 그리는 SF 영화에서조차 우리가 위안을 얻는다면 바로 아이의 모습으로 보여 지는 마지막 희망 때문일 것이다. 그 아이들이 자라갈 세상을 저렇게 만들지는 말아야겠다는 무의식적인 다짐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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