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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가슴 뛰는 그날이 가까워 온다.
젊은 피로 이룩한 진정한 민주혁명. 성스러운 민주제단에 피를 바친 울산의 열사가 있다. 그는 북구 농소 천곡 출신으로 나의 고교동기생인 정임석 열사다. 4·19 때 경무대 앞의 데모대열에서 총탄에 쓰러져 우리 곁을 떠나버린 그를 그리며 4·19에 앞서 영령에게 보내는 추모사를 띄우려 한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친구여!
오늘은 봄비가 촉촉이 대지를 적시고 늘 창가에서 짖어대는 까치소리도 들리지 않아 아침부터 왠지 쓸쓸해지는 날이었다. TV에서 벌써 활짝 핀 매화를 비추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어쩐지 더디오는 우리마을의 봄을 느끼다가 문득 너를 생각하고 모교로 달려갔다가 돌아온 길로 이 글을 쓰고 있다. 1965년 8월 29일 나와 박준욱 군이 이리 뛰고 저리 뛴 끝에 세운 너의 추모비를 찾아갔던 것이다. 60년이 다 된 추모비를 어루만지며 네 생각으로 울고 말았다. 나를 부축한 후배에게 부끄러워 돌아서 먼 산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지만 생생한 기억으로 살아나는 너의 모습이 떠올라 몸을 떨어야했었다. 친구여! 어찌하여 이렇게 나는 지지리도 못난 놈이 되어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어야하고 친구를 생각하며 눈물이나 닦는 비열한 놈이 되었는지 원통해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구만리 하늘과 땅으로 갈라놓고 60년 세월을 넘겼어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졸업식 날이었지? 정든 교문을 나서 철길을 걸으면서 앞이 보이지 않던 장래를 막막한 심정으로 너와 나는 말을 주고받으며 시내까지 걸어와서는 옥교동 어디쯤에서 단팥죽 한그릇씩을 먹고 헤어졌었지? 그리고 그 해 연말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던 어느 날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어 화신백화점 뒤쪽 어느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씩 사먹고 헤어졌었지? 그것이 너와 내가 이승에서 마지막 얼굴을 마주한 때가 될 줄이야…. 하늘은 알았으련만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인생이 그렇게 거두어진다고 해도 남은 나는 그래도 기억을 살리고 있다만 너는 죽음이란 장막이 쓸어간 비극이 되었구나.
그렇지만 너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고 있는 못난 친구를 잊지말아주게나. 온 나라가 젊은이들의 함성에 묻히면서 네가 눈을 감은 그 순간의 죽음은 죽어서도 죽지 않은 죽음이었다. 바로 네가 그 죽음을 택함으로서 죽어 서도 사는 죽음을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었지, 네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날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중앙시장으로 드는 길 쪽의 민주당 지구당 사무소에 잠시 누워있던 날, 나는 몰려온 시민들을 헤집고 들어가 너의 시신을 보면서 주먹을 쥐고 결심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죽어서 사는 뜻을 일러주고 간 너를 기리는 흔적을 남기고 말겠다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때의 결심이 결실을 맺어 오늘 찾아간 네 영혼이 서린 추모비를 실컷 어루만지다 온 것이다. 생각하면 세상모르고 겁도 모른 채 마냥 순진했던 그때가 한없이 그리워지는구나. 친구여! 오늘은 그 추모비가 서게 된 내력을 밝혀 두려한다. 이제 나마저 가버리면 모교의 역사 한 페이지가 묻혀버릴 것 아니겠는가?

내가 건립취지문을 쓴 그 방명록을 들고 박준욱 군과 같이 서울로 간 것은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듯이 그때는 모든 일을 그곳을 통해야했던 이후락 선배를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또 많은 동문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선배님을 만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을 청와대 정문 맞은편 수도경비사예하부대의 부대장이었던 손영길 선배께서 주선해주셨다. 내가 불쑥 내민 방명록을 훑어보신 이 선배님은 다소 당황하듯 안색이 금방 바뀌는 것이었다. 뒤에 알았지만 4·19 이후 부쩍 심해진 학생들의 시위로 대통령이 촉각을 세우고 있는데 데모하다 희생된 사람의 비를 세운다면…. 그래도 돌아서는 우리가 안쓰러웠던지 이 선배님은 다시 불러 세운 다음 상업은행남 대문지점에 가서 고태진 지점장을 만나고 가라는 것이었다. 그 때 같이 일어선 김정호 선배가 우리를 태워주시고 기어이 점심을 먹고 가게 하시어서 따뜻한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김 선배는 범서출신으로 동문이었고 서울특별시 부시장으로 계셨다. 이 선배님의 계좌에서 건립비용을 인출해주시던 고태진은 조흥은행장을 지낸 전 울산상의 고원준 회장 부친이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부산의 김해두 선배에게로 갔었다. 늘 호두알을 소리나게 굴리시던 김해두 선배는 나의 설명을 듣고 나서 말씀하였다.

"좋습니다. 그런데 추모비를 세우겠다는 학성공원 보다 내 생각엔 넓은 모교의 교정이 좋을 것 같은데… 사적지에 조형물을 세우는 데는 권력이 행정을 깔아뭉갠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그 말을 듣고 "선배님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우리는 물러나왔던 것이다. 과연 행정고시 제1회 합격자로 이미 행정의 달인이 되어 많은 고향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던 김해두 선배이셨다. 친구여! 너의 추모비는 이렇듯 여러 선배님들과 모교의 적극적인 협조로 세워졌다. 더욱이 나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신 박목월 시인이 비문을 써주시고 또 보훈처가 호국의 영웅이 된 동문 차성도 중위의 비를 그곳에 세우고 또 한자리에 아담한 공원을 꾸몄다. 이 모든 것을 전 노진달 총동창회 회장의 열성이 그 곳을 모교의 성지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친구여! 인간에게 있어 죽음보다 더 엄숙한 것은 없다. 인간만이 이 엄숙한 죽음을 맞으면서 그 죽음을 의미 있는 삶으로 승화시키는 예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 소중한 삶을 죽어서도 다시 살게 만든 그리운 친구여! 자랑스런 정임석 열사여! 무궁한 세월 속에서 영원히 편히 영면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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