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활짝 꽃 핀 벚나무가 호수로 가지를 드리운다. 늘어진 꽃가지들 사이로 잔물결에 원앙 한 쌍이 놀고 건너편의 나지막한 능선이 부드럽다. 황금빛 햇살에 호수가 반짝이더니 그새 노을이 든다. 노을도 벚꽃물이 들어 연분홍으로 번진다. 원앙과 호수와 능선, 노을이 벚꽃가지에 걸쳐져 평화로운 그림 한 폭이다. 벚꽃이 만발하니 연붉은 살구꽃도 필 것이다. 흰 배꽃이 가지에 펼쳐지며 분홍빛 복사꽃이 몽환적으로 피리라.

"하돈갱(복국)은 복숭아가 아직 떨어지기 전에 복어를 청미나리와 조화하여 유장으로 국을 만들면 진미하다." <동국세시기>의 한 구절을 읽는 순간 너무도 아름다워 마음이 휘청하고 접질렸다. 음력 칠 월 쯤의 복어에 미나리를 넣고 국을 끓이면 맛이 있다, 하고 써넣어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을 별 상관도 없는 복숭아를 난데없이 데려다 놓았다. 머나먼 바다 속을 헤엄치며 살아가는 복어와 끝 간 데 없이 광활한 땅 위에서 흙을 딛고 열린 복숭아를 만나게 한다. 거기에다 청미나리가 파랗게 돋아 있다. 탐스런 복숭아와 청미나리의 시각적 생기가 신선하다. 복국 이야기가 이리도 예쁘장하다. 

대번에 영상이 떠오른다. 한여름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어 외려 안도감이 드는 태양 아래에서 무르익어 다디단 단내가 진한 복숭아밭이 저만치 초록빛 산을 배경으로 질펀하다. 아름다운 과일은 꽃같이 예쁘다. 꽃송이 같은 수밀도와 독을 품고 거센 파도 헤치는 복어와 교류시킬 생각을 해냈다. 잘 익어 풍요로운 복숭아밭을 푸른 바다로 향하게 한 선조들의 낭만과 여유로움에 가슴이 쩍! 소리 없는 소리를 지른다. 자연과 함께하는 격조가 가득하다.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대학자 신흠은 자연에 묻혀 전원생활을 하며 산문 <숨어사는 선비의 즐거움>을 썼다. '거문고는 오동나무 가지에 바람이 일고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타야 어울린다. 자연의 음향이라야 거문고와 서로 잘 조화되기 때문이다.' 한다. 영혼을 담은 음률에 자연을 채운다. 기척도 없이 홀로 깨어 있는 느낌이다.

산에 앉힌 집에서 '둑을 높이자니 꽃이 걱정이고 대문을 옮기자니 버드나무가 다칠까 걱정이다' 하며 마음을 쏟는다. 꽃들의 흔들림, 버드나무의 정지가 만들어 낸 고요함 같은 것이 일상의 기쁨으로 사랑하며 즐기는 모습이 선하다. 텔레비전 뉴스에선 횡령, 거짓말, 살인, 성폭행 등 외면하고만 싶은 사건들이 터져 나온다. 억새풀엔 자칫하면 손을 벤다. 뉴스를 보다 보면 무심히 있다가도 억새풀 상처가 마음에 죽죽 그어지며 힘이 든다. 핏방울이 방울방울 맺히는 쓰라림을 이런 고운 말을 떠올리며 견딘다.

깊은 산 속에서 화로에 향을 피우며 고아하게 살고 싶지만 벼슬길에서 물러난 그에겐 '좋은 향이 떨어지고 남은 것이 없다'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 뿌리며 가지며 잎이며 솔방울 같은 것을 한데 모아 짓찧은 다음 단풍나무 진을 섞어서 동그랗게 빚어 두었다가 가끔 한 알씩 사르면 맑고 고상한 맛이 있어 좋다' 하고 넌지시 알려 준다. 향이 좋은 향을 향로에 불붙이고 맑은 차를 마시며 차향을 즐기던 사람은 그것을 귀애하는 애착이 크다. 속세를 떠나 모든 것에 초연하고 수행이 깊은 훌륭한 스님도 향과 차만은 선호하던 모습을 대한 적 있다. 학문으로 이름을 떨치고 많은 벼슬을 한 한문 4대가인 신흠이 이전에 누리던 호사한 것들에서 미련을 거두는 모습이다. 자연에 소박하게 섞여들어 살아가는 그의 사소함에 대한 글들이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옆에 밀려나서 나만 쓸쓸하게 턱을 괴고 있는 듯 여겨지다가 나직나직 들려주는 그의 얘기에 조용한 힘이 난다. 벅차서 힘겨워하던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엄두가 나는 것이다.

까치복을 손질할 때 먼저 껍질 벗긴 놈을 대야의 물에 넣어놓으면 홀딱 벗겨진 까치복이 풀쩍 뛰어올라 정확하게 저를 벗겨낸 사람의 이마를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버리곤 한단다. 다부진 복어를 하등 만날 일 없는 어여쁜 복숭아와 연관 지어 놓은 옛사람들의 정서가 고매하다.
재를 쌓아 놓고 바람 부는 것을 알아내고 숯을 달아 두고 비가 올 것을 예측한다는 말을, '쌓은 재가 바람을 알고 숯을 달아서 비를 안다' 하며 한낱 잿개비와 숯으로도 생활 속의 정서를 곱게 추스른다. 청아한 생각과 말은 꽃보다 향기롭다.
기품 있는 글을 읽고 있노라면 헝클린 실타래를 쉽게 푸는 것처럼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묵묵한 자신감이 모여드는 것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