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기
체기
  • 울산신문
  • 승인 2018.04.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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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선 수필가

스스로 복작복작 속을 긁는 일이나, 남을 향한 원망은 하루에 몇 번씩 하는 설거지처럼 훌훌 흘려보내기가 쉽지 않다. 오늘도 달그락달그락 부딪히는 그릇 소리만큼이나 복잡한 사연이 설거지 사색대 위에 올랐다.

하고 많은 시간 중에 왜 설거지를 할 때마다 미뤄뒀던 말이 생각날까? 제때 못한 인사도, 하고픈 말도 꼭 이때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 앞치마를 입었고, 고무장갑도 꼈고, 손에는 주방 세제가 묻어 있는데. 전화를 걸어 방금 생각났다고 미뤄놨던 말을 하기에는 상황이 번거롭다.

 

쌓아두면 체기가 될
생각의 찌꺼기들도
훌렁훌렁 보낼 수 있다면
그만일 텐데

설거지를 끝내고 앉아 작정하고 아까 했던 생각 조각을 주워 모아 보려고 시간을 되감아 봐도 이미 흘려 보내버린 설거지물처럼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무릇 평소 생각도 설거지물을 흘려보내듯 흘려보내기가 수월하다면 삶이 현재보다 더 담백해지지 싶다.

인간사가 복잡다단한 것은 한낱 지나간 시간 속에 발목 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될 터다. 더러 스스로 했던 행동이나 말의 실마리가 꼬투리 되어 공공연히 씨름할 때가 한두 번이던가.

엊그제 일이다. 주차장이 아닌 곳에 차를 대자마자 옆 가게 주인이 나와서 차를 빼라고 했다. 본래 2층 시장의 계단 밑이라 보행로 정도를 두고 자주 차를 주차하던 곳이었다. 제 가게 앞도 아닌데다 사정 조도 아니고 명령조에 하는 말에 기분이 나빴다. 평소에 차를 대고 위 층 방앗간으로 올라가 빻을 거리를 맡겨놓고 바로 오고는 하던 곳이라 예사로 듣고 계단에 올라섰다.

그런데 그 주인이 삿대질하며 딱지를 끊는다며 윽박질렀다. 유별나게 강받게 구는 그녀를 보며 딱지를 끊기고 안 끊기고는 내 사정이니 걱정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속으로 삭인 만큼 속에서 체기가 되었는지 방앗간에 들어섰는데 얼굴이 후끈거렸다. 그녀의 거친 말이 내 심장을 후려친 결과였다.

상가에서도 포달스럽기로 소문난 그녀라는 말을 방앗간 주인으로부터 들었다. 그 말에 나름의 위안을 삼고 태연히 돌아왔건만, 집에 와서까지도 쓸데없는 감정을 씻어서 흘려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듯 복작대며 끓는 속 변덕을 누구라 알까,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변덕스러운 나만 알 뿐이다. 아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수돗물에 가라지 떠내려 보내듯 시간 속으로 흘려버리면 그만일 텐데, 개수대 거름망 속에 걸린 음식 찌꺼기인 양 마음 턱에 걸쳐둔 채 흘려보내지 못한다.

상대는 내 속을 긁기 위해 한 말이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이 자신의 영업에 손해될까 봐 미리 예민해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인데… 씻은 그릇과 씻지 않은 그릇의 구분된 자리처럼 그녀와의 사이에 벽을 쳐 버렸다. 같잖은 일에 생각을 매달아 시간을 허비하는 내가 어리석기 그지없다.

갖가지 반찬을 담았던 그릇을 흐르는 물에 씻어 뽀득뽀득한 느낌이 나도록 닦아 켜켜이 엎어서 물기를 빼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된장찌개가 끓어 넘쳐 냄비에 붙은 거품 자국이나, 생채 접시에 붙은 고춧가루를 씻어내듯 잡다한 생각을 모아 몸 밖으로 씻어 버리면 될 일이다.

쌓아두어 체기(滯氣)가 된 생각 찌꺼기들도 훌렁훌렁 떠내려 보내고 말갛게 쟁여 둔 그릇들처럼 편편해 지려면 얼마나 더 수양이 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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