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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 보면 서로간의 예의를 지켜야 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가까운 관계이든 먼 관계이든 예의와 배려를 갖추어야 하고 또 본인보다 사회 경제적 위치가 다르다 할지라도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상대방에 비해 우월의식이 작용하면 예의와 배려를 배제한 행동이 속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본인이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상대방 역시 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고 똑같이 대하게 된다. 본인이 예의와 배려를 받고 싶다면 그렇게 먼저 행동하면 될 것이다.

얼마 전 인격적으로 좋은 사람도 동물을 학대하는 것에 대한 글을 읽은 바 있다. 가축을 사육하는 농장의 주인이 자신이 기르던 돼지를 학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으로 온화하고 좋은 사람으로 평가된 인물이었다. 그가 동물을 학대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동물이 생명체로서가 아닌 '물건' 혹은 '사물'로 생각한다는 결론이었다. 

옛 로마의 귀족들은 다른 성별의 노예가 있는 앞에서 옷을 스스럼없이 벗거나 갈아입었다고 한다. 그들이 문란해서는 아니다. 노예가 인격체가 아닌 물건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계급적으로 평등한 현대사회에서 조차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경우는 수 없이 많다.

동물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더 보호해 주어야 할 작은 동물을 학대하는 경우도 부지기수 이다. 우리는 인간과 생명체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약한 존재라고해서 무시하거나 동물을 학대해서도 안 된다. 인간이라고 해서 그러한 권리는 없다. 

더 나아가 비가시적인 부분까지 예의와 배려를 적용하면 어떨까?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면 마음으로 더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에 대한 예의는 약속시간을 확실히 지키는 것, 공간에 대한 예의는 청소와 정리정돈이다.

'시간' 이라는 개념은 영속적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도 늙고 세상도 변화하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대로 흘러가기에 너무나 아까운 존재이다.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없다.' 라는 속담이 있듯 한번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이 주어지지만 나에게 귀한 시간이라면 상대방에게도 귀한 시간이다. 서로간의 약속에서 시간을 확실히 엄수한다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자 시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필자는 학창시절부터 바쁘게 움직이며 공부에 시간을 할애하고 성인이 되고난 이후에는 일에 치이며 바쁘게 살아왔다. 그러한 핑계로 주위의 환경을 정리하거나 깨끗이 청소하는 일은 잘 없었다. 결혼 후 비로소 아기를 낳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며 정리와 청소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환경이 쾌적해지자 일의 능률도 오르고 복잡하던 여러 생각들도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출수록 깨끗하고 정리된 공간 역시 필자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듯 했다. 시·공간에 대한 예의는 상당히 추상적이다. 그러나 조금씩 하나하나 지키고 살아가다 보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응이 될수록 삶은 풍요로워진다. 

인간에 대한 예의부터 동물,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예의를 지키며 한번 살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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