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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것은 이 작품이 한국에 처음 번역 소개된 1981년도이다. 그 당시 첫 번역 제목은 『희랍인 조르바』로 기억한다. '희랍'은 그리스(Greece)의 음역어로, 요즈음은 그냥 '그리스'로 번역한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발표한 해가 1946년 이므로 우리나라에 소개 된 것은 꽤 늦은 편이라 하겠다. 350쪽이 넘는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에 빠져서 금방 읽어버린 책 중의 하나다.
그 당시에도 책을 읽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대목이 조르바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인 '나'에게 한 말이다.
"당신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이야기 아시겠지.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을 보고 철자법을 배우겠다는 생각은 당신도 않으시겠지.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인간의 이성이란 그거지 뭐."
이 조르바의 말에서 왜 이성(理性)을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에 비유했을까 하고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이번에 30여 년 만에 다시 책을 읽어보면서 그 대목에서 옛 기억이 되살아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식인들이 머리 싸매고 운운하는 이성이라는 것을 물레방앗간 안집 주인 궁둥짝만도 못한 것이라고 조롱한 것일까.

마침 일본어판 『그리스인 조르바』가 책장에 꽂혀 있어서 그 대목을 찾아보았다. 일본어판 책 제목은 『그 남자, 조르바』이다. 일본에서는 1967년에 처음 번역 소개되었으니, 우리나라 보다는 일찍 번역 소개된 셈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어판에는 '물레방앗간'이 아니라 그냥 '방앗간'이고, 안주인 '궁둥짝'이 아니라 '등짝'이었다. 이즈음 되고 보니 이 작품 원서를 구입해서 비교해 보고 싶어졌다.
우리나라 문학적 배경에 물레방앗간이 주는 인상은 강렬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님도 보고 뽕도 따고'라는 말만 들어도 무엇을 말하는지 일일이 설명을 안 해도 짐작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느낌에서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으로 번역했을 것 같다. 아무튼 나의 이 의문의 끝은 원서를 구입해서 연구하는 일일 것이다.

오늘은 내 마음 속에 있던 조르바를 떠나보내는 날이다.
조르바는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이 작품으로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낳은 최고의 인물이 되어, 어느새 '조르바'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원래 '조르바'는 '자유의 삶'이란 뜻으로, 이 작품 이후로 '조르비즘(조르바주의)'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게 되었다.

작품은 젊은 지식인인 '나'가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가 60대 노인이지만 거침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조르바를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책벌레인 '나'는 새로운 생활은 해보기로 결심하고 크레타 섬의 폐광을 빌려 조르바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나'는 조르바의 거침없는 행동과 언어에 빠져들게 되고 그의 자유로운 영혼에 감동하곤 한다. 나 역시 작품을 읽는 내내 조르바의 목소리가, 그의 절규가 들리는 듯 했다.

"두목! 이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같이 부정, 부정, 부정입니다! 나는 이놈의 세상에 끼지 않겠어요. 암, 나 조르바, 벌레 같은 놈, 굼벵이 같지만 어림없고 말고! 왜 젊은 것은 죽고 늙은 것들은 살아야 하나요? 왜 어린 것들이 죽습니까! 아들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이걸 세 살 때 잃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절대로, 절대로 이 생각만 하면 하느님을 용서할 수 없어요. 아시겠어요?"
조르바의 슬픔이 그대로 전해져,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세상을 달리한 사건을 떠올리며, "어찌하여 어린 생명들을 앗아갔습니까?" 하고 목 놓아 외치고 싶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 본능에 아주 충실한 사람, 여자를 쫓아다니며 사랑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 주어진 일에는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 가장 영혼이 널리 트이고, 육체는 자신감에 넘치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을 가진 활기 넘치는 사람, 영원히 자유를 외치며 그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 사람, 그가 바로 조르바인 것이다.
앞으로 조르바 만큼이나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생산해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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