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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껏 8년을 넘게 근무하던 병원을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정작 그곳에 있을 때는 못 보던 것이 눈에 띄이게 된다.

이제껏 보던 환자분들의 치료에서 반성되기도 하고 개선해야할 사항이 보이게 된다. 사실  환자들과의 이별에 대한 준비를 나름대로 해왔었는데도 그렇다. 이별과 그리하여 생긴 부재는 심리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항상 해왔던 말인데 만남 보다 이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남은 자신이 의도했던 것이 아니지만 이별은 그래도 의도했던 것일 수 있고 준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남은 선택할 수 없는 때가 많은데 이별은 선택 사항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을 선택하면서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별은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감정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이 자신과 그리고 타자와 어떻게 관계해왔나 하는 것을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만남이란 이렇게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만남'이라는 것이 물건이나 다른 어떤 생명체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인간만이 만날 수 있다. 곤충끼리도 만나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엄격한 의미로 만남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곤충은 인간처럼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세계에서 자신을 이해하지도 않고 세계가 주는 '의미'를 행동하지도 않는다. 

곤충이나 개는 자신의 환경에서의 물체에 밀집되어 있어 그들이 하는 행동은 즉각적인 주위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조우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것이다.
신도 우리 인간이나 다른 실체들을 만날 수 없다. 그것은 신이 너무 밀집되어 그들에 의해서 결정되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그의 창조물이고 그가 '시키는 대로이며' 그들 창조물 전체가 영원히 자신에게 '투명한' 것이기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해 인간은 밀집되어 있지 않고 다른 실체를 '초월'하며 그렇게 가지고 있는 자신의 세계를 '기획투사'하는 것으로 타자와 물건에 대하여 거리를 둘 수 있는 것이다. 인간만이 타자를 홀로 놔둘 수 있고 또는 그들을 떠나서 홀로 있을 수 있다.

하이데거 철학에서는 서로 만날 수 있음이 세계와 같은 그런 것을 그 자신에게 드러낼 수 있는 '세계개현'에서라고 하며 그럴 때만이 타자와 진정 만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세계가 이미 내 자신에게 밝혀져 있는 것이어서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런 세계를 함유하는 내 자신을 표현하는 말로 '내-존재'라는 것이 있다.

심리학 용어로 하면 아마도 내면쯤 될 것인데, 내면에서 스스로를 느끼면서 자각하고 성찰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정도가 세계와의 진정한 관계 정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환경은 어떤 것인가. 내면과 일치하는 세계인 것인가. 하이데거는 내면과 외부세계 또는 주체와 객체 같은 분리된 형이상학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유했다. 우리는 세계개현으로서의 내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내면과 세계가 따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일상의 가까운 세계는 그것이 너무 가까워 안보일 수가 있다. 왜냐면 우리가 그것을 '따라서' 거주하는 세계란 바로 '눈앞'의 세계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의 '사실'은 그만큼 오해와 망각이 생겨나게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살아놓고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럴 즈음' 항상 스스로를 되새기려고 노력한다. 내 양심 같은 것 말하자면 내면이 무엇이라고 하고 있는가  되비쳐 보는 것이다. 되비치는 것은 항상 현재 나의 감정 같은 것이다.
나의 감정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외적 기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중해야 할 것이다. 감정으로 드러나는 이곳 혹은 '저곳존재'는 우리가 사는 세계 내 상황적 존재인 것이기에 법 같은 외부 기준이 아니라 이제는 사용하지도 않는 퇴화된 것 같은 내적 양심을 다시 불러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롭게 시작하는 환경이지만 그러나 바뀐 것은 없는 것 같다. 다시 이 생활에 몰입하게 될 때쯤이면 또 다시 망각하게 될 근본적인 것 초심인 그 양심을 내가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를 경계하는 일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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