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나라 신종 때 시인 소식(蘇軾)이 모함을 받아 황주(黃州)로 좌천됐다. 그는 자주 적벽(赤壁)을 찾아 시를 지었는데 내용이 묘했다. 소식의 시는 물가의 겨울 풍경을 묘사하고 있었지만 물이 줄어들어 돌이 드러나는 이치를 꼬집었다. 그 장면에서 나온 말이 수락석출이다.

물이 풍성하면 요란하다. 굽이치고 솟아오르고 회오리치는 모양이 소리와 함께 한바탕 우렁차기 마련이다. 문제는 물의 항상성이다. 안타깝게도 물은 사시사철 언제나 풍족하지 않다. 물이 마르면 요란한 적벽의 풍경도 우렁찬 소리도 잦아든다. 한바탕 선거가 지나간 자리는 스산하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당선인들의 인사말과 성원을 잊지 않겠다는 낙선자들의 읍소가 한밤의 소주병처럼 도로에 나뒹군다.
선거 때문에 가려지긴 했지만 북미회담의 뒷이야기가 회담당일 뉴스보다 많이 쏟아지고 있다. 이번에는 트럼프가 북한 언론의 충성심에 경외감을 드러냈다는 보도가 화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을 칭송하는 조선중앙TV 여성 앵커를 칭찬하면서 그녀가 미국 방송사에 취직해야 한다는 농담을 던졌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했다. WP는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에 머물 때 조선중앙TV를 시청하다 김 위원장을 찬양하는 조선중앙TV 여성 앵커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트럼프는 "여성 앵커는 김 위원장과 북한의 긍정적인 모습만 부각시켰다"면서 "이 여성 앵커를 (내게 우호적인) 폭스뉴스에 취직시켜야 한다"고 조크를 던졌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농담은 자신에 매우 비판적인 미국 언론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WP와 뉴욕타임스, CNN 등 주류 매체들을 '가짜뉴스'라고 비난하고 있다. AP통신은 북·미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북한 매체의 표현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고 보도했다. 특히 트럼프에 대한 호칭이 달라졌다고 한다. 과거 김정은은 트럼프를 '노망난 늙은이(dotard)'라고 부른 적도 있다. 이후 아무런 경칭 없이 '트럼프'라고 지칭하다가 북·미 정상회담을 거치며 '미합중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최고 지도자' 등 존칭을 쓰고 있다.

우스개소리에 불과할지모르지만 트럼프의 이 같은 농담은 이번 북미회담 전체를 아우르는 트럼트의 인식체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특히 회담이후 첫 조치로 이야기되는 군사훈련 중단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북미회담이후 한국과 미국 정부는 동시에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겠다는 방침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청와대는 8월로 예정된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 중단 문제에 대해 "한·미 간 협의가 이미 시작됐다"고 밝히고 있고 미 국무부도 "(북한과의) 생산적인 대화가 지속되는 한 한국과의 '전쟁 게임'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애드벌룬을 띄우고 있다. 문제는 훈련중단보다 트럼프의 인식이다. 지난 12일 트럼프는 김정은과 회담한 후 기자회견에서 "그 값비싼 '전쟁 게임'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이슈가 됐다. 백악관의 입장은 "(북한에) 선의(善意)를 보이는 차원"이라고 하지만 딱한 판단이다. 당장 미국의 보수우파 거두인 존 매케인은 성명을 통해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는 것은 실수"라고 했다. "한·미 연합훈련 중단은 불필요하고 일방적인 양보, 나쁜 협상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쟁 대비를 위해 필수적인 훈련을 게임이라 조롱하고 한 발 더 나이가 훈련을 도발적이라고 표현해 중국과 북한의 선전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는 꼴을 분명하게 지적한 셈이다. 

이번 북미회담의 실질적인 승자가 김정은이라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판정이 입증되는 순간이다. 트럼프가 공언했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와 비핵화 일정은 몇차례 악수와 스킨십으로 구겨졌다. 그 과정에는 김정은의 연기력이 한몫을 했다. 싱가포르에서의 김정은은 난폭하고 극악무도하고 포악한 독재자가 아니었다. 가끔 수줍어 하기도하고 때론 당당하게 보이기도 하면서 불쌍한 척 약한 척 하는 연기도 곧 잘했다. 가능한 실리를 챙기기 위해 본심은 제대로 감추고 상대의 비위를 맞춰가는 전략과 전술은 북한 괴뢰도당의 오래된 비책이다.

사람들은 잊고 있고 잊기를 바라고 있지만 우리에게 김정일과 김정은 부자가 보여준 햇볕의 진실은 극명하다. 김대중 정부가 괴뢰집단과 뒷거래를 한 이후 북의 핵개발은 노골화됐다. 햇볕의 이름으로 퍼다 준 돈으로 김정일은 영변에 진달래를 뽑고 약산을 허물어 핵개발의 속도를 가속화했다. 그 결과가 2006년 첫 핵실험으로 드러났고 이제는 그 아들이 핵완성을 청구서 품목에 올리고 국제사회에 당당히 지급보증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대북 퍼주기가 우리 사회의 금기어를 넘어 트럼프의 입까지 점령했다는 점이다. 북을 괴뢰집단으로 부르고 대북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면 시대에 뒤떨어진 인사거나 수구골통으로 매도해 조롱과 삿대질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문제는 온통 평화라는 이름으로 진실이 가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괜찮다는 논리는 곤란하다. 허용되는 것과 넘지 말아야 할 것은 분명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가 오늘의 상황과 미래의 모습을 만든다는 점은 반면교사로 학습한 분명한 사실이다. 왜 김정은이 지금 국제사회에 나서 기름진 미소를 보내고 있는지, 무엇이 그들을 동굴 속에서 나오게 했는지 정면으로 봐야 한다. 비가오고 물살이 빠를 때는 적벽의 암석들은 물줄기에 가려 볼 수가 없다. 비 그치고 땡볕이 오래되는 시간이면 거친 바위의 모습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