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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호승의 '선암사'에는, 살다가 때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고 한다. 아무도 없는 그곳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다 보면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창작과 비평사, 1999)고 한다. 

해우소(解憂所), 해우(解憂) 즉 볼일뿐만 아니라 근심을, 걱정을,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얻게 되는 그 모든 힘겨운 짐을 아무런 미련 없이 내려놓는 곳. 화장실이나 뒷간보다 '해우소'란 단어가 참 예쁜 말이란 생각이 새삼 든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필자는 한 번도 아랫배의 신호 즉시 화장실 간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요것만 조것만 이러다 손 못 놓고 미적거리다 정 급해지면 후다닥 가는 게 예사였다.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늘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혼이 났으면서도 지금도 그 습관을 제대로는 못 고쳤다. 참으로 미련하단 말을 들어도 싸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대로 살았던 셈이다. 어쩌다 눈물이 나거나 마음 다치는 일과 맞닥뜨리면 몇 날 며칠 만사를 놓고 고통스레 헤맨다. 그리곤 그뿐이었다. 일상을 핑계로 도무지 내려놓는 법을 배울 마음의 여유가 시쳇말로 일도 없었으니….

여유를 두지 않고 있다 다급하게 서두르면 꼭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하고 만다. 심지어 지나치게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필자는 그걸 뼈저리게 경험했다. 예의 그 사소한 일상적 욕심이 이것만 저것만 하다 몸의 이상 징후를 그만 놓쳐, 결국 잘 나가던 대학마저 그만두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지만, 결국 죽음의 문턱에 들고서야 어리석게도 뒤를 되살필 여유를 얻었다. 

팍팍한 눈앞의 현실을 핑계로
마음의 여유 챙길 시간 없었으니
나만의 해우소 하나쯤 가진다면
일상이 훨씬 풍성해지지 않을까



얼마 전 치른 6·13 지방선거에 나온 어느 후보의 공약에도 '저녁이 있는 삶'을 본 듯하다. 물론 보다 차원 높은 질적인 삶을 말한 것일 테지만, 얼핏 경제적 풍족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삼포세대' '오포세대' '이태백' '사오정'이 난무하는 팍팍한 눈앞의 현실 때문이겠다. 동떨어지고 너무 뜬금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는 마음의 여유부터 챙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물리적인 여유에 내면의 성찰이 전제되지 않으면 화장실은 화장실에 불과하다. '저녁이 있는 삶'은 신기루일 뿐,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유서 『논어』 '학이'에서 증자는 일일삼성(一日三省) 즉 하루에 세 번 되살필 것을 언급했다. 그 자신도 늘 이 말에 철저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천여 년이 흐른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그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따지고 보면 성현 증자의 '일일삼성'이 뭐 별건가 싶기도 하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드나드는 화장실을 해우소다 여기고 그 순간만이라도 좀 전의 내 말 내 행동 혹은 그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이라는 걸 해 본다면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은 오랜 옛날부터 성찰의 상징적 장소인 저 해우소와 매우 유사한 곳을 가까이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집 뒤뜰의 텃밭 곧 파밭 말이다. '파밭이 좋다'고 잔잔하게 노래한 홍문숙의 '파밭'(2011년 세계일보 신춘 당선작)을 읽으면 깨닫게 된다. 

시를 보면, 곱디고운 새색시 시절, 어머니가 겪었을, 파 냄새보다 더 지독했을 시집살이의 매운 내를 그곳 파밭에서 눈물로 갈무리하며 헹궈내던 것을 시인은,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다"고 물기어린 시선으로 노래한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천천히 밭고랑을 빠져" 나온다. 즉 '어머니의 어머니'나 화자에게 있어 '파밭'은 매운 파 냄새보다 고통스러운 그 서러움을 말끔히 씻어내고, 파보다 훨씬 푸르고 싱싱한 힘을 얻어서 다시 일상을 힘차게 살아내는 원동력의 성소인 셈이다. 

그렇다.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도 위 시 속 화자들처럼 나만의 '해우소', 나만의 '파밭'이란 숨구멍 하나쯤 가진다면 눈앞의 일상이 훨씬 풍성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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