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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푸른 것은 온갖 나무들이 지닌 생명 의지 덕분일 것이다. 강이 맑은 것은 하나하나의 물방울이 오염을 다독이는 덕분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희망인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희생하며 살아가고 있어서가 아닐까.

그런 사람을 안도현 시인은 시 '너에게 묻는다'에서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연탄재에 비유했고, 이생진 시인은 시 '벌레 먹은 나뭇잎'에서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고 읊었다.

연탄재나 벌레 먹은 나뭇잎은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주변의 이웃이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은 가슴 속에 시의 씨앗을 품고 있고, 그 씨앗을 싹틔우기 위해 시를 찾게 된다.

○옥 님은 평생 가정주부로 살며 남편이 회사에서 인정받도록 하고, 자식도 소위 '스카이' 대학에 보냈다. 그 분이 접어둔 문학소녀의 꿈을 찾아 시를 배운다. 그에게 시는 어린 날의 꿈을 여는 문이다. ○경 님은 칠순이 넘어 시를 접하더니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최근에는 어릴 때 총상을 입은 자신의 일대기로 지방 신문 논픽션 공모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에게 시는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회춘의 명약이다. ○율 님은 시를 공부하다 울산문학 신인상을 받아 시인이 되었다. 그만 둘 법도 하지만, 함께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이끌며 시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에게 시는 세상을 보는 눈이다.

그 밖에 뒤 늦게 시를 알게 된 ○희, ○식, ○숙, ○섬, ○채, ○학, ○지, ○인, ○임, ○연, ○조, ○경, ○정 ○현 님 등 숱한 분들.

이들은 필자가 재능 기부 차원에서 진행 중인 '울산 시 창작 교실'의 회원들이다. 이 분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가족이나 사회를 위해 스스로 연탄재나 벌레 먹은 나뭇잎의 길을 훌륭히 걸어왔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하나하나가 연탄의 온기를 지니고 있고, 풀잎의 향기를 풍긴다. 이들의 삶을 읽으면 그것이 곧 시다.

시라고 하면 보통 낯설고 어려운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시 창작은 언어 활용의 측면에서 가장 고도의 표현 능력이 필요하므로 이런 생각이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시를 감상하고 또 자기 나름의 시를 쓰기 위해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

물론 시에 관심을 가지고 창작한다고 해서 이름을 날리는 일류 시인의 자리까지 바랄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되면 좋지만 모두가 그런 재능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시를 짓다가 도저히 맞지 않으면 시를 감상하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그도 아니라면 우리가 외롭거나 슬플 때, 속상할 때, 마음이 아플 때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를 한 명 사귀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자본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의 삶은 주로 금전의 척도로 파악된다. 금전은 가장 상층의 권좌에 있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종처럼 부린다. 그 횡포에 상처 한번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오죽하면 어떤 시인은 황금만능의 사회에서 시를 공부하는 사람을 '미친 제자'라고 표현하여 시대를 꼬집었을까? 하지만 자본이 어둠의 위력을 드러낼수록 역설적으로 시가 발하는 등대의 불빛은 더욱 밝아진다.

시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하고, 주변의 상처 받은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들과 연탄의 따스함과 풀잎 향기를 주고받는다. 시는 나아가 세상의 아픔에 눈을 돌리게 한다. 다문화 가정에 관심을 갖고, 노동자의 억울한 사연에 관심을 가지며, 이산가족의 아픔을 넘어 통일을 지향하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할지 그려 보여준다.

시를 읽는 것은 세상을 아는 일이고, 시를 짓는 것은 그 길을 다시 세상에 알리는 일이다. 시를 접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 늦었다 생각하지 말고, 어렵다 생각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시의 물결에 온몸을 맡겨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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