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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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신문
  • 승인 2018.07.0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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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주 수필가

유리병 속의 알사탕은 찬란했다. 색색의 사탕들이 유리병 안에서 알알이 빛나고 있었다. 둥근 유리병에 꽉 찬 사탕들을 훤히 들여다보며 원하는 사탕색깔을 말하고 있으면 신나고 설레었다. 항상 시꺼먼 색 바지를 입고 맨 위 선반에 놓여 있던 과자상자를 내려 먼지를 후후 불곤 하던 가게 주인아저씨의 손은 청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탕을 꺼내고 있는 손마디 굵은 아저씨 손이 맑은 유리병 안에선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해 보였다. 손주를 곁에 두고 보고 싶다는 할아버지의 성화로 나는 세 살에 시골집에 보내져서 초등학교 입학식을 앞둔 일곱 살에 도시의 부모님 곁으로 왔다. 도시에서 생전 처음 본, 전깃불 환한 가게의 달콤한 사탕과 과자가 가득 든 유리병은 환상의 세계 같이 눈부셨다.

어머니 손을 잡고 맨 처음 광복동에 나가 제과점에서 슈크림 빵을 먹던 날의 기억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달콤하고 감미로운 빵을 먹으며 제과점의 넓은 유리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바깥 풍경을 내다보노라면 일곱 살짜리 가슴이 아득히 벅차올랐다. 유리창이 이편과 저쪽을 다정하고 스스럼없이 이어 주고 있었다. 여과 없이 투명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유리가 풍경을 가로지르는 정의로움 같았다. 

 

  여과없이 투명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풍경을 가로지르는 정의로움


유리창 앞에 서면 단숨에 밖의 풍경이 다가선다. 햇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축복을 받는 느낌이다. 때때로 침체되어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마음을 유리창이 있어 밖을 향하여 눈을 들게 한다. 바깥에 더 넓은 세상이 펼쳐져 있음을 너그럽게 보여 준다. 유리창은 안과 밖을 구분할 뿐 갈라놓지 않는다. 부단한 삶은 스스로 끈을 놓지 않듯이 유리창은 복작이며 살아가는 공간의 시야를 확장시켜 준다. 섞여드는 공간의 행간을 넘어 마음의 여유를 들어서게 한다. 유리창이 빡빡한 우리 삶에 말미 한 조각 간직했다 기꺼이 내어놓는다.

그 아름다운 유리를 끼워 넣었다. 그런 곳에다.

친구는 아흔넷의 친정어머니를 시설이 잘 된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병환이 중태인 어머니를 보러갔는데 요양병원의 규정 따라 유리창 너머로 누워 있는 모습만 보고 왔다고 한다. 중환자 상태여서 세균 감염 등의 이유로 유리창 저쪽에 격리된 엄마 손 한 번 잡지 못하고 돌아왔단다. 노환으로 생을 마감하느라 의식도 잃고 온 힘을 그러모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엄마를 자식은 그저 유리 칸막이 너머로 멀거니 쳐다보는 것만이 유일한 일이었다.  

제 인생 살아내느라 부모를 소홀히 했던 자식도 이 세상을 떠날 채비를 하는 부모한텐 허겁지겁 들여다보게 된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려니 했던 부모의 손도 세삼 애틋해져서 잡아보곤 한다. 효성이 극진하지 않은 자식일지라도 한순간에 떠나갈지 모르는 부모의 덮고 누운 이불깃이라도 다독이며 젖어드는 눈가를 꾹 누르곤 하는 것이 자식 된 마음이다. 생살을 찢기며 낳아서 품에 안고 키운 자식의 음성이 어머니는 한없이 익숙하다. 노쇠하고 기력이 없어 눈도 뜨지 못하고 꽉 감겨 있지만 밥 잘 드시고 오래 사셔야 한다고, 어쩌면 하나마나한 자식의 한 마디에도 어머니는 봄날에 피어난 복사꽃 색 같은 안정감을 얻을 것이다. 아무리 편리하고 위생적인 걸 우선하는 시대이지만 검불처럼 쇠잔해진 부모와 그 자식 사이에 유리창을 끼워 넣다니….

에스터 헤리슨의 소설 '엄마의 마지막 말'에서 사람이 영면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암으로 침대에 누워 죽음을 예감하는 엘리자베스는 정오까지만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태양이 집의 다른 편 쪽으로 넘어갔을 때에도 그녀는 아직 살아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무런 기척도 할 수 없지만 계단을 딛는 소리, 딸과 단골 미용사 등이 자신을 죽었다고 단정 지은 뒤에 나누는 대화도 다 듣는다. 그런 후 마침내 죽는다.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 숨이 멎은 뒤에도 청각은 살아있다고 한다. 온 힘을 다해 살아낸 이 세상을 떠나는 즈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무엇으로도 반응할 기력은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절절히 그리워하고 있을지 모른다. 손을 잡힌 채 사랑한다고, 함께 해서 행복하고 고마웠다고,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진심어린 말들을 가까이 듣고 싶을 것이다. 그 두터운 숨결을 식어가는 품속에 따뜻이 간직할 것 같다.

사람이 한세상 지내오며 '살며 사랑한' 것밖에 더 있는가. 치매에 걸린 노인들은 남편과 아내,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하염없이 생각하고 기다리지 않던가. 자식이 엄마! 하고 부르며 손을 잡을 때 알아보고 반기는 표현은 못하지만 깊숙한 곳, 사랑으로 뭉쳐진 마음 한구석이 뜨겁게 소용돌이치지 않을까.

유리는 사람의 마음을 차단하고 봉쇄하는 일에는 결코 끼어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무참해하고 있을 성 싶다. 사람과 사람, 또는 자연을 연결하고 관심의 힘을 뚜벅뚜벅 키워나가리라 홀로 다짐하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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