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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월드컵 축구경기로 열기가 꽉 차 있다. 경기에 몰두해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빠져들어 가듯 보다가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경기를 멈출 때는 잠시 숨을 멈춘다.
멕시코와 경기를 할 때였다. 우리 선수가 거침없이 상대 진영을 돌파해 나갈 때 상대 선수가 우리 선수의 다리를 찼다. 누가 봐도 의도적인 듯한 상대편의 반칙이었다. 상대방 선수에게 파울이 선언될 줄 알았는데 그대로 경기가 진행됐다.

 

유난히 우리선수에 엄격했던
월드컵 축구경기 심판들
규칙은 지키라고 만든 약속
어디서든 정당한 판정이 필요


그런데 정작 우리 선수에게는 과격한 몸싸움에서 짐짓 일어날 만한 접촉에도 심판이 노란 경고장을 들어 올렸다. 얼토당토않은 판정에 실소를 넘어 부아가 끓어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목표물을 향해 맹렬히 추격하던 사자가 넘지 못할 벼랑을 맞닥뜨려 사기가 떨어지듯 어리둥절할 때 역습을 당해 첫 골을 내 주고 말았다.

스웨덴과의 경기 때는 빠르게 돌파하는 우리 선수를 상대 선수가 옷을 잡아끄는 노골적인 장면에서도 경고장을 들지 않았고, 또 다른 우리 선수의 종아리를 지끈 밟아도 경고를 주지 않았다. 스포츠계에서는 오심도 경기 일부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지만 그렇다면 그 오심을 걸러내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경기를 보면서 유럽이나 축구 강국에 유난히 후한 심판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을 나만 하는 게 아니지 싶다.

경기가 끝나고 기자들이 숨을 헐떡이며 필드를 벗어난 선수들에게 경기 소감과 다음 경기 전에 대한 계획을 물었다. 그러자 선수들은 무수히 하고픈 말이 많았을텐데도 불구하고 말을 아꼈다. 죽을 힘을 다해 뛰었으면서도 한 결 같이 자신들이 부족했다고 했다. 그 자신을 탓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운지 자꾸 눈물을 훔쳐내는 선수도 있었다.

경기를 앞두고, 월드컵 경기에 출전해 득점한 적이 있고 그 성과와 경험이 있는 우리 해설자가 말했다. 체구가 큰 상대편을 전략적으로라도 일부러 거칠게 대할 필요가 있다고, 승부사의 기질을 발휘해야 한다고, 먼저 득점하는 게 중요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팔이 안으로 굽기 마련인 해설자의 마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해설자의 자세는 옳지 않다. 규칙은 지켜야 한다. 지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지켰는데 졌을 때가 억울한 것이다.

스포츠 경기에 문외한인 나는 축구의 기원은 모른다. 다만 어릴 적에 마을 들판과 산의 경계인 둔덕에서 오빠들이 공을 찼다. 새끼를 꼬아 둘둘 말아 만든 공으로 축구경기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는 당연히 오빠가 낀 편을 응원하거나 타 동네와 겨룰 때는 우리 동네 팀을 응원했다.
규칙이란 지켜지지 않기에 만들어진 양쪽의 약속이기도 하다. 이미 만들어진 규칙은 지켜져야 한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여 행하는 경기에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식의 규칙은 있어 무엇하랴.

필드에 나선 심판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꿋꿋함으로 정판하여 훗날, 영광스런 월드컵축구 심판이었다는 명예를 남기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4년, 혹은 몇몇 곱을 더 갈고 닦아 단련해서 나온 월드컵 선수들이다. 그들의 노력에 건강한 스포츠맨십을 더하여서 이긴 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진 자에게는 격려의 포옹을 나눌 수 있도록 당당한 심판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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