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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8월이 왔다. 지난해 8월 전쟁기념관이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투쟁에 헌신하고 순국한 고헌(固軒) 박상진(1884.12∼1921.8) 선생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을 때 울산시민들은 내고장 출신의 인물이 호국인물이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했다. 울산은 일제강점기를 떠올리면 독립의 의지가 어느 곳보다 강했던 항일투쟁의 중심 도시였다. 그 울산이 근대화의 성지이자 미래 대한민국의 풍향계로 거듭난 도시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끈 선열들의 희생이 어느 곳보다 빛난 도시가 울산이다. 바로 그 중심에 고헌 박상진 장군이 있고 외솔 최현배 선생이 있다.

울산시도 최근 내 고장을 빛낸 인물들을 새롭게 조명해 후세에 널리 알리고 도시의 자랑으로 선양하기 위한 사업을 구상중이다. 우리가 선열들을 기억하는 일은 내일의 위대한 여정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청산되지 못한 일제강점기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는 일이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왜곡되게 알도록 해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이 땅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조상에 대해 부정적인 지식을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전방위적인 역사왜곡을 자행했다. 그 잔재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아직도 일제의 손으로 만든 조선의 역사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네스코의 텍스트가 됐고, 날조된 고대사가 고스란히 세계인들의 동북아 교과서가 되어 오늘까지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정확한 수도 파악되지 않는 위안부 희생자나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문제는 여전히 용서되지 못한 역사로 남아 있다. 그래서 8월은 우리에게 더 많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선열들의 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8월하면 떠올리는 호국인물은 바로 울산출신 박상진 의사다. 박상진 선생은 울산사람이다. 울산이 낳은 근대 인물 가운데 박상진 선생은 단연 특출하다. 그는 1884년 12월 7일 울산 송정동에서 박시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자(字)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固軒)이다. 선생의 부친은 한말 승지(承旨)를 지냈고, 선생이 출계(出系)해 모신 백부(伯父) 시룡(時龍)은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전통적인 유가(儒家) 가문에서 출생한 선생은 일찍부터 한학을 배웠다. 특히 선생은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 등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許蔿)의 문하에 들어가 1902년부터 수학하면서 척사(斥邪)적 반(反)외세 민족의식을 키웠다.

박상진 선생은 이후 양정의숙에 진학,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됐으나 사퇴했다. 그 후 독립운동에 투신해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결성에 앞장섰다. 선생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으로 독립을 달성할 목적으로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돼 1921년 교수형을 당했다.

박상진 의사의 항일투쟁은 척사적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신학문을 수용한 민족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박 의사가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가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의열투쟁을 전개해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게 했다. 실제로 선생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전국의 부호들에게 재산에 비례한 군자금의 의연을 통고하고 군자금 조달에 주력했다.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회, 광주, 삼척, 예산, 인천, 용천, 서울, 해주 및 만주 안동 장춘에 설립된 곡물상, 잡화상을 연락 거점으로 군자금을 모으고, 친일부호 처단, 독립군 양성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 2월1일 박상진은 생모의 출상 하루 전날 장례에 참석했다가 장승원 처단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체포됐다. 경주수비대 수백명이 녹동 상가를 급습했다. 이 무렵 대한광복회는 전국 조직망이 발각돼 주요 인물이 검거되고, 사형당해 조직이 대부분 파괴돼 있었다. 충청지부장 김한종,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충청지부 단원 장두환, 황해지부장 이관구 등이 체포됐다. 경주 수비대로 끌려간 박상진은 공주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일제는 1919년 2월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을 때까지 무려 14개월이나 박상진을 고문했다. 일제는 고문을 하면서 대한광복회에 활동자금이나 군자금을 헌납한 민족자본가와 애국지사의 명단을 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박상진은 그러나 고문과 고통 속에서도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1960년 북구 송정동 생가가 있는 지역의 인사들이 모여 박상진추모사업회를 발족, 학성공원에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 추모비를 건립했다. 천안에도 광복회기공비가 세워졌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지금 선생의 생가는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됐다. 이후 일부는 현대식으로 개조됐으며, 또한 2003년 안채가 복원됐다. 이제 우리는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이를 계승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시점이다. 이는 역사가 주는 어제의 교훈이자 내일의 좌표를 제대로 읽어야할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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