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과불린(改過不吝)- 아무나 친구는 될 수없다
개과불린(改過不吝)- 아무나 친구는 될 수없다
  • 울산신문
  • 승인 2018.08.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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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편집이사 겸 국장

염천 더위도 한풀 꺾였다. 다시 8월이 왔고 광복되지 못한 우리의 광복절은 건국절 논란과 뿌리 논쟁으로 시끌한 기념식을 치러야 할 모양새다. 지난 2010년으로 기억한다. 울산시가 일본 구마모토(熊本)시와 우호협력도시 협정을 체결했다. 우호협력의 종잇장에 서명을 하고 광범위한 교류를 다짐했다. 행정은 물론 의회와 민간 부문에서까지 이미 활발한 교류가 있으니 우호협력도시 협정은 당연하다는 뉴스도 나왔다. 그 후로 다시 세월이 흘렀고 엄청난 교류가 있었다. 어린 학생들부터 원로문인들까지 해마다 벚꽃이 필 때면 구마모토로 오가는 발길이 '사쿠라' 꽃잎처럼 번잡스러웠다.
구마모토. 울산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에서 퇴각하면서 많은 울산 사람을 끌고 가 지금까지 그곳에 울산마찌(蔚山町)라는 마을이 남아있을 정도다. 오래전 한 방송이 구마모토성(城)에서 '우정의 콘서트'를 마련한 것이 계기가 된 이후 울산과 구마모토는 마치 옛친구를 만난 듯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교류를 할 때마다 두 도시의 대표들은 '화해'를 이야기 하고 '과거를 뛰어넘는 미래'를 이야기 했다. 왜 뛰어넘어야 하고 왜 화해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고 화해의 전제는 무엇인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8월이 오면 대한민국 사람들의 심장이 뜨거워진다. 일제강점기의 시간동안 벌어졌던 이야기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가 당했던 폭압과 비인간적인 현장을 오버랩해서 만은 아니다. 우리도 모르게 흐르는 압제의 공포에 짓눌린 유전인자가 8월이면 다시 살아나 흥건한 외침으로, 뚜렷한 요구로 펄떡거린다.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이야기를 해보자. 미쓰비시는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을 잔학하게 학대한 기업으로 유명하다. 미쓰비시는 2차대전 당시 원폭현장에서 살아남은 한국인들을 끌고가 폐허가 된 나가사키에서 청소를 시켰던 기업이다. 그 미쓰비시는 오늘까지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 침묵은 일본의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다. 울산사람들이 10년 가까이 오간 구마모토 사람들은 다를까. 천만에 말씀이다. 그들은 한번도 울산시민들에게 오래전 울산 장정들을 끌고가 노예보다 못하게 부려먹은 일과 열다섯 갓 넘은 처자부터 유부녀까지 마구잡이로 끌고가 능욕을 벌인 일을 정면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울산 장정들과 처자들을 끌고가 만든 성이 일인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구마모토성이다. 구마모토성을 축조한 자는 조일전쟁 때 조선인 학살과 문화유산 파괴자로 악명이 높은 가토 기요마사다. 울산에 왜성을 지어 수비에 치중한 가토는 조일전쟁 7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처절한 전투로 알려진 울산성 전투를 맞이했다. 애마를 죽여 피를 마시고 인육을 먹고 버틸 수밖에 없었던 가토는 도망치다시피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영지에 성을 쌓았다. 바로 구마모토성이다. 가토는 구마모토에 대규모 축성사업을 시작했다. 울산성 전투의 악몽을 거울삼아 성 안에 우물을 무려 120개나 파고 건물 벽체와 다다미에 고구마줄기를 말려 만약을 대비했다. 일본 근대 내전에서 치열한 공방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세이난전쟁 때 사이고는 1만 4,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50여 일간 구마모토성을 공격했으나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갔다. 바로 이 전쟁 직후부터 구마모토성은 난공불락 철옹성의 상징이 됐다. 그 난공불락의 성을 밑바닥부터 쌓아올린 이들이 울산의 장정들이었다.

울산마찌는 구마모토의 조선인 강제 수용지역의 별칭이다. 가토는 조일전쟁 패전 직후 울산을 거점으로 축성에 동원된 울산 사람들을 대거 잡아갔다. 그 수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수천 명은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토는 잡아간 울산사람을 울산마찌라는 이름으로 통제하며 성을 쌓았다. 가토의 잔학상은 이뿐이 아니다. 울산 학성을 점령한 가토는 울산동백에 매료돼 마구잡이로 뽑아갔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가토에 능욕당한 울산동백은 이후 울산에서는 모두 고사했고 일본 교토 지장원에서 키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9년 일본에서 울산동백을 발견한 최종두 전 한국예총 울산지부장 일행이 삼중 스님과 함께 약탈된 지 400여년 만인 1992년 국내로 들여와 울산시청 등지에 심어 뉴스가 됐던 일은 지금도 유명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필자가 1990년 온산공단 방도리 앞 춘도를 탐방했을 때 이 섬을 지키던 노인이 전해준 이야기도 가토에 대한 구비전승 자료였다. 춘도는 조일전쟁 당시 화살촉에 사용되는 대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유명했는데 왜장 가토는 춘도의 절경에 반해 이 곳에 거처를 짓고 별장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별장에 음주가무는 필수로 울산 각지의 어린 처자 수십명을 끌고와 춘도에서 향락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이야기와 그 원혼이 춘도 동백으로 피어나 봄이 오기 전 목을 자르듯 핏빛 꽃송이를 떨어뜨린다는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가토가 조일전쟁 하사품으로 받은 땅이 구마모토다. 어리석은 울산의 리더들이 울산마찌라는 친근한 이름 하나에 반해 구마모토와 울산을 친구로 만든 것이 2010년의 일이다. 울산마찌는 가토의 발바닥을 닦고 왜놈의 오물을 치우는 종살이로 끌려간 옛 울산인들이 무더기로 모여살던 동네이름이다. 치욕의 역사, 능욕의 역사를 살피지 않은 우호협력은 개념 없는 이벤트다. '위아 더 월드'라고 아무나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잘못을 따져 바로잡는 데는 인색함이 없어야 한다. 개과불린이다. 뜨거운 8월에 차갑게 생각해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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