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시영은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그곳에서 깊이 관여한 민족지도자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대개 그랬듯이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고국에 돌아와서 나라를 위해 몸을 던져 헌신한 큰 인물이었다. 이시영이 부통령으로 선출되고나서 취임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날 울산군청을 찾아오게 되었다. 군수실에 들어서고는 "나 이시영이오!" 하고 군수에게 물었다. "김홍조의 묘소가 먼 곳에 있습니까?" "예,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이시영은 혼잣말처럼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찾아보고가야지" 하고는 안내직원을 따라 학성공원을 향해 바쁜 걸음을 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지난 광복절 기념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운동가는 마지막 한사람까지 찾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그렇다면 김홍조도 이 기회에 독립운동가로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을 다시 가다듬어 보게 되었다.


김홍조의 선대는 울산의 대지주인 부자였다. 이렇게 큰 부잣집의 아들로 울산 중구 반구동 서원에서 태어난 그는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거부가 되었고 그렇게 모은 재산을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아낌없이 통 큰 기부로 내놓았다.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단체를 성심으로 도왔다. 무엇보다 개화운동에 힘쓰며 몸소 선진의 정신을 실천했다. 그것을 증언하는 실적이 찬란하게 남아 있다. 민족지도자 이시영이 그 때 몸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랄 바쁜 시기에 무엇 때문에 먼 울산에 와서 묘소를 참배하고 갔을까? 그것은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보내는데는 본인도 본인이려니와 그 자금을 가장 안전하게 송금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적시에 받아쓰게 해준 김홍조 동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달라는 임정요인들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김홍조가 세운 고향 하상면의 신식학교 일신학교(병영초)의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공중으로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울려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산 전역으로 번지고 전국방방곡곡이 만세소리로 요동칠 때 남만주로 와서 이시영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조선 전역에 불붙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참고 몸조심하시다가 돌아오셔서 경성에서 만납시다!" 하면서 허리춤에 찬 광목띠 속에 숨겨온 생활비를 건네주고 가던 김홍조가 뼈에 사무치게 고마웠기 때문이다.


추전 김홍조는 독립운동사에 영원한 불멸의 금보석이 될 부산의 백산상회를 사실상 운영한 숨은 재력가였다. 백산 안희재가 고향 의령의 논 200마지기를 팔아 몇몇 실업가들과 세운 이 회사에 추전은 자신이 유학시켜 전문금융인으로 키운 언양 상북면 출신의 윤상은을 내세워 경남은행과 유기적인 관계로 운영했다. 윤상은은 상해로 군자금을 가지고 갈때도 동행한 측근이었고 뒤에 추전과 사돈을 맺은 인물이었다. 부산에서 이름을 떨치게 여유있는 자금을 굴린 회사였다. 벽산무역(주)로 상호를 바꾸기도 하다가 부산이 개항되고 도시가 번성되는 시기를 지나다가 문을 내린 회사였지만 이 회사가 독립운동에 기여한 실적은 오래도록 역사에 남아있을 것이다.
부산이 개항되고 경부선이 개통되고나서는 추전에게 기회가 된 시기였다. 부산항이 개항된 후 김홍조의 재력은 이때부터 거부의 자리에 앉게 된다. 추전은 개화된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이란 신념을 갖고 있었다. 고향 울산에 일신학교, 남목의 계운학교(남목초), 울산여자학교, 진주에 일신여자학교를 설립하여 오늘의 명문 진주여고가 되었다.


김홍조는 경남은행의 전신인 구포은행의 대주주로 설립에 참여했다. 이 밖에 부산 초량에 설립한 주일은행은 개업을 앞두고 경남은행에 합병시켰다. 이를 두고 보면 오늘의 경남은행이 대은행으로 성장하는데는 초기 출범 당시 김홍조가 발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한 말 고종의 궁궐에서 같이 관직 생활을 한 인연으로 절친이 된 박영효는 추전의 일생동안 운명을 같이 하는 도반이 되었다. 추전은 민족지 동아일보 창간에 뛰어들어 주주발기인이 되었다.
또 진주에 경남일보를 창간하고 초대 사장이 되기도 했다. 풍운의 시대에  55세를 일기로 김홍조가 1922년 9월 11일 세상을 떠나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추전의 영면소식을 알렸다.
경남 울산읍내에 사는 김홍조씨는 신병으로 오래 신음하던 중 지난 11일에 드디어 이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일찍이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 박영효씨 등 국사범을 위하여 많은 동정을 하였으며 그 후 귀국하여서는 경남일보, 경남은행 등에 관계하는 동시 교육계에도 많은 힘을 기울여 덕망이 많았던바 55세로 그만 세상을 떠났다. 1868년 1월 18일에 태어나 비교적 단명으로 세상을 하직한 추전 김홍조였지만 이와 같이 다방면에 걸쳐 유업을 남겼다. 이를 정리하여 일대기를 기록한 사람은 고인이 된 향토사학자 이유수였다. 그러나 그 정리된 기록 중에도 여기저기 오류가 발견되고 곳곳에 바로잡아야할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다행히 후손 김진규씨가 그의 부친과 같이 수십년 동안 모아둔 자료를 정리중에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지역사회가 밝혀야할 초점은 추전의 업적 가운데 독립운동부분이다. 이를 밝혀내는 일은 역사학자들의 몫이어야 할 것이다. 부디 전문가들에 의해 사실 진위 여부가 밝혀져 고인이 지금과 같이 묻혀 있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향토의 정체성을 더욱 확립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