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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에 몇 차례씩 만나는 젊은 시절의 셋방살이 동기가 있다. 그녀는 내가 갖고 있지 않는 재능을 여럿 가지고 있다. 그중 미용기술은 대단하다. 처음 만날 때는 이십대 초보였지만 끊임없는 공부로 지금은 대학 강단에도 설 정도다. 그런 그녀가 벗이 돼 마흔 해가 지난 지금까지 내 머리 손질을 해주고 있다. 물론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그녀만의 특별한 계산 방식은 매우 합리적이라 나는 당당한 VIP 고객이 돼 부담 없이 드나들고 있다.
달포 전에도 늦은 저녁 시간에 들렀다. 직원들은 퇴근하고 원장인 동기만 남아 내 머리를 손질하고 세발까지 해주는가 하면 산만한 눈썹까지 참하게 다듬어 주었다. 그간의 이야기를 하면서 일을 하는데도 실수가 없다. 전문가다운 면모다. 그날 그녀는 큰아들 내외 이야기를 했다. 우린 석 달 차이를 두고 첫아들을 얻었다. 그래서 아이들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문제는 혼기가 차다 못해 넘어가고 있는데 두 녀석 모두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아 걱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아들이 사귀던 처녀와 결혼을 했다.
먼저 숙제를 한 그녀는 연신 벙글거리면서 미장원에 들릴 때마다 아들과 며느리 사는 이야기를 했다. 며느리로부터 초대받은 일이며 반찬 만들어 준 일까지 무척 즐거워하는 모습에 행복이 보였다. 본래 짭조름한 사람인데 요즘은 좀 싱거워진 듯하다. 말수도 적었는데 말이 많아졌다. 그녀가 기꺼워하는 며느리의 힘을 느끼자 아직 미적거리고 있는 아들의 행태에 화가 났다. '사대육신 멀쩡하고, 생각도 있고, 직장도 있는 놈이….' 속으로 한바탕 시작하려는데 그녀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킥킥거리기까지 하면서 웃는다.
"글쎄, 손녀가 보고 싶어 그저께 저녁에 아이들 집에 갔는데 아, 글쎄…." 하면서 말을 잊지 못하고 또 웃어댄다. "결혼을 하더니 둘이서 그렇게 많이 싸우더라구. 우리 며느리가 개띠 아이가. 안 질라고 날마다 토닥거리면서 차례로 일러바쳐서 정신이 없더니만 요즘 조용하더라구. 이번에 가서 그 까닭을 알았다. 며느리가 띠를 바꿨더라구. 개띠인데 여우띠로 말이다" 혼자서 손뼉까지 쳐가면서 웃었다. 말수가 적지만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이라 다음 이야기가 더 기대돼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한참 웃고 난 뒤에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아들 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다용도실의 선반을 받치고 있던 못이 헐거워져 며느리가 퇴근한 아들에게 고쳐달라고 하자 금방 문제를 해결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잘 안 되던데 오빠는 너무 쉽게 하네. 오빠 머리 정말 좋다아" 시어머니인 그녀가 보기엔 자신이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빠 머리 좋다' 그것도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정말'까지 들고 나오는 며느리의 호들갑이 보통이 아니더란다. 아들은 으쓱해하며 한 수 더하더라는 것이다. "별거 아니야" 정말이란 말이 분위기를 환하게 바꿔놓더라고 했다.
"아, 글쎄 그 아이들이 어느새 띠를 바꾸었더라고. 며느리는 여우띠, 아들은 곰띠로" 계속 웃는 모습에서 그녀의 신혼시절이 떠올라 나도 많이 웃었다. 결혼하고 분가한 첫 번째 집에 그녀도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미용사 초년생으로 저녁 7시쯤 피곤한 기색으로 퇴근하곤 했다. 그녀 부부의 방은 우리 방 바로 옆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엌 앞을 지나다녔다. 당시 나는 출산을 앞둔 때라 남편이 도와주는 것을 그녀가 종종 보고 부러워했던 모양이다. 가끔씩 토닥거린 이유가 우리 부부 때문이었다는 것을 아이들이 다 자라고 난 뒤에 이야기해 서로 웃은 적이 있다.
남편과 동갑인 그녀 역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여우띠로 바뀌었다고 한다. 별일 없다면 적어도 반백년은 살아야 하니 물고 뜯고 싸우는 일은 가장 나쁜 수에 속한다는 것을 금방 알았던 모양이다. 개띠를 포기하는 며느리를 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젊은 날이 생각나 자꾸만 실실 웃어댄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구 곰이 되는 것도 유전인가? 아들이 딱 저거 아부지야. 이제야 방향을 잡은 것 같네"
살면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동기의 며느리는 일찍 알아차린 것 같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무모하고 오랫동안 부끄러운 일이 될 거라는 것도 깨달은 모양이다. 결혼하면 배우자의 표정이 바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한 결과 정답으로 얻은 것이 지혜로운 여우였을 듯하다.
주변과 비교하며 그들을 좇다가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혼란스러울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녀의 며느리와 아들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는 중인 듯하다. 날마다 사는 방식을 새롭게 하며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 왔다. 부딪치면서 깨닫고 방법을 찾거나 때로는 만들어내는 지혜로운 젊은 사람들의 모습에 과거 우리 모습이 투영돼 있다. 시어머니가 된 그녀와 나도 그렇게 세월의 힘으로 몽돌이 되었을 것이다. 편하게 둥글어진 그녀의 웃음이 자애로워 보인다. 아마 며느리도 그녀와 닮은 여우띠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들아, 나도 괜찮은 여우띠 선배가 되고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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