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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야(草野)의 노래

박영식

타오른 초록산을 병풍으로 들려놓고
사랑 미움 떼어놓고 남루마저 벗어두고
먼 하늘 무심을 가꿔 풀빛 닮아 살어란다.

뻐꾸기 목청 풀어 청배 같은 달이 뜨면
들개울 흰물소리 시름 꿰어 펼쳐널고
죄처럼 말없는 삶을 참흙속에 심어란다.

떠나는 님을 보면 구름이듯 바람이듯
한 조각 아픈 맘도 꽃노을로 물들이며
어여삐 남는 설움만 솔밭에나 묻어란다.

△박영식 시인: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백자를 곁에 두고』 『굽다리접시』 『자전거를 타고서』 『가난 속의 맑은 서정』 등이 있음. <김상옥시조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한국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등 수상. 한국시조시인협회 및 울산시조시인협회 회장 역임

 

이서원 시인
이서원 시인

전통 중국에서 우주의 자연스런 순리에 순응하고 가르치는 학파를 일러 도가(道家)라 부른다. 그 중심에 도연명의 시가 있다. 그는 위대한 전원시인이며 우리나라의 많은 문인들도 그의 시를 사랑했고 영감을 받아 창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오늘 박영식 시인의 시에서도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은연중의 소망이 간절하게 드러나 있다. 각 종장마다 "살어란다" "심어란다" "묻어란다"라는 제3자의 청유형을 드러내고 있지만 실상은 스스로 그렇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도시의 이 구석 저 구석을 누빌 만큼 누비고 다닌 집배원의 직업을 끝으로 조그마한 문학공간에서 시와 벗하며 사는 그곳이 자연일는지도 모른다. "초록산을 병풍으로 들려놓고" "청배 같은 달이 뜨면" "구름이듯 바람이듯" 산다는 것은 무위자연의 그 중심이며, 누구나 동경하는 진리의 실현이요 구원일 수도 있겠다.
다시 도연명을 생각해보면 그의 대표 시 '귀거래사'에서 등동고이서소(登東皐以舒嘯) 임청류이부시(臨淸流而賦詩) -동편 언덕에 올라서서 노래를 읊조리고, 맑은 물에 이르러선 시와 부를 짓나니 - 라고 했다. "들 개울 흰물 소리"를 앞에 두고 "떠나는 님을" "구름이듯 바람이듯" 바라보면서 시를 짓는 작가와 도연명이 겹쳐진다. 실로 자연은 우리들의 스승이고 만인들이 노래하는 숭고한 의미이며 서정인 것이 틀림없다. 철리(哲理)의 가장 위봉이 자연이고 그 속에 인류의 삶이 함께 공존해 가고 있다.
오늘 '초야의 노래'에는 아등바등 살아왔던 우리들의 길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길가 풀밭에 앉아 먼 산 한 번 우러러보라는 의미로 들린다. 냇물 소리 들어보고 멀리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면서, 아팠던 기억과 힘겨웠던 일들도 꽃노을에 묻으며 다시 힘을 내라고 어깨를 툭툭 쳐주는 것으로 들린다.
시어는 평이하되 시의는 깊고 풍격(작품의 분위기, 운치)이 아름다울 때 좋은 시라 하듯이 초야의 노래는 그 의미를 다 갖추고도 남았다 하겠다. 지나친 과장이나 수사법의 도용을 통해 난해한 것만이 좋은 시가 아니라 가장 진솔하고 소박하고 울림이 가슴에 오래 남는 메아리 같은 시 한 편이야말로 최고의 시가 아니겠는가!
 이서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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