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三道) 축제장에서 만난 인연
삼도(三道) 축제장에서 만난 인연
  • 울산신문
  • 승인 2018.09.0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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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자 수필가

원시림으로 뒤덮인 마구령을 넘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안개 자욱한 숲길을 더욱 운치 깊게 몰아간다. 산모롱이를 돌아서자 수려한 산세에 안긴 김삿갓 문학관이 보인다.

산 깊은 골이라 조용할 것 같았던 문학관 모습이 아니다. 길가에 세워진 차량 행렬과 천막 규모를 보아 제법 큰 행사가 있는 듯하다. 벌써 잔치 분위기가 고조되었는지 빗소리와 함께 구수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때마침 나선 길이 삼도(三道) 접경지 이웃들이 모여 화합하는 날이다. 강원도 영월, 충북 단양, 경북 영주 사람들의 흥겨운 웃음소리가 소백산 줄기를 타고 수런수런 흘러 퍼진다. 한낱 길손에 지나지 않은 우리 부부는 이들에게 폐가 되지는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학관을 기웃거린다. 

일 년에 한 번 접경지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행사를 주관한다. 올해는 김삿갓면 사람들이 애쓰는 것 같다.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따뜻함을 느낀다. 그 덕에 우리는 문학관 구경도 하고 좋은 사람들까지 만날 기회가 생겼다.
옆에 섰던 낯선 사람이 가벼운 목례와 함께 말을 걸어온다. 어느 구역 주민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울산에서 올라왔고 문학관을 둘러 여행하던 길이라는 말과 함께 이런 행사가 있는 줄 모르고 왔는데 화합의 자리가 훌륭해 보인다는 칭찬을 건넨다.
'잘 오셨다'는 인사에 금방 이웃이라도 된 양 편해진다. 가끔 텔레비전에서만 보았던 곤드레 비빔밥에 뜨끈한 곤드레 국 한 사발을 들고 와서 식기 전에 얼른 먹으란다. 내리는 비 탓인지 오슬오슬 한기를 느끼면서 받은 소박한 밥 한 그릇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아마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것 같다.

배가 든든해지자 이곳으로 발길을 둔 일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음식 끝에 정이 난다고 옆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웃이 되어 세상사 이야기가 길어진다.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순수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마음에 문이 쉽게 열린다.

내일 당장 이곳으로 이사 온다 해도 다정하게 이웃이 되어줄 것 같은 사람들이다. 순박하고 정겨운 인심에 반해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려던 계획이 느려진다. 딱히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다. 바람이 쉬어가면 우리도 쉬어가고, 구름이 산마루에 걸터앉으면 우리도 앉았다 가면 그만이다. 굳이 방랑 끼를 배우지 않아도 백두대간의 품이 절로 마음을 풀어지게 한다.

몇 순배 술잔이 돌아가자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서먹함이 없다. 서울에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부부가 헤어지기 아쉬운지 우리 부부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는 선심을 보인다. "지나가는 길목이니 잠시 들렀다가 차나 한잔하고 가세요."라는 말이 허물없다.
처음 만난 사람을 집으로 오라 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오라 한다고 선뜻 가겠다고 대답하기도 곤란하다. 김삿갓 묘지를 둘러보고 가겠노라는 말을 에둘러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묘지를 둘러보고 오 분 정도를 내려오자 서울 사람이 일러준 황토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탁 트인 마당 앞으로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뒤뜰에는 멋쟁이나비가 날아드는 예쁜 버섯집이다. 말로만 듣던 귀촌이 이런 것이구나 싶어 호기심이 몰려온다. 심산유곡에다 황토집을 짓고 장작더미 땔감을 가지런히 쌓아 놓은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인 듯 정겹다. 끌리듯 마당으로 들어서자 백구 한 마리가 꼬리치며 반긴다.

재스민 차 한 잔으로 가볍게 시작된 자리가 조금 전 문학관에서 만난 다른 일행들이 찾아오면서 장뇌삼주로 이어진다. 작정하고 만난 사이처럼 술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세상사 시름 다 잊고 마음을 풀어 놓는다.

우리를 빼고 나머지 일행들은 삼 도를 걸쳐 서로 다른 농사를 지으며 왕래가 잦은 사이다. 앞산 허리에 걸쳐진 구름 몇 조각이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줄 뿐, 적막하기 그지없는 외딴집이다. 외로워서 어떻게 지낼까 싶었는데 이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심심할 틈이 없다는 주인아주머니의 귀띔이다.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만 한 대씩 보일 뿐 새소리도 잠자는 고요한 영월이다. 서울서 영월로 귀촌한 지 삼 년이 되었다는 집주인, 포항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부석사 근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사람, 더덕 재배로 재미를 솔솔 본다는 단양 아저씨, 자동차 공장에서 밥 벌어 먹고사는 우리, 각기 다른 타지 사람인데 형제들이 어울린 듯 허물없다. 사는 모습은 제각각 달라도 오랜만에 진하게 우러난 인간미를 맛본다.

아무리 좋아도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게 인생이다. 즐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행장을 꾸린다. 두어 달 뒤, 도심이 숨 막히면 다시 찾아오겠노라는 약속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잘 가라는 말, 또 오라는 인사에 가슴이 뭉클하다. 김삿갓 지팡이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다 벗어나도록 그들의 시선이 차창으로 따라붙는다.

영월에서 얼마나 벗어났을까, 남편의 전화기에서 벨 소리가 울린다. 엿 들리는 내용으로 보아 사과 농사짓는 아저씨 같다. '내려가는 길에 부석사로 들렀다 갈 수 없느냐'며 자장면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단다. 남편의 마음은 어느새 부석면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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