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고여들고
사랑은 고여들고
  • 울산신문
  • 승인 2018.10.0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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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주 수필가

지난 추석 스마트 폰에 문자로 명절인사들이 들어왔다. 그 중에는 풍요로운 한가위 되라는 다운 받은 그림으로 보낸 추석 인사도 있었다. 잊지 않고 기억해 주어서 고마웠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한 통로의 이웃 아이가 안녕하세요, 하고 무심히 던지는 의례적인 말 같기도 해 보는 마음이 조금 밋밋해지기도 했다. 내가 고루해서인지 그림 밑에 직접 써넣은 문자 몇 글자 달려 있으면 더욱 고마울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큰아버지 집안에 양자로 간 추사가 8세 때 아버지 김노경에게 보낸 편지엔 아이의 천재성과 따뜻한 마음이 들어 있다. '장마 더위에 건강은 어떠신지요? 너무나 그립기만 합니다. 저는 어른 모시고 글을 읽으며 잘 지내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한자로 쓴 8세의 추사 글씨체는 이미 천재성이 엿보인다. 

거기에 추사의 아버지는 '편지가 도착해서 네가 어른 모시고 책을 읽으며 잘 지낸다는 것을 알았단다.……' 하고 받은 편지의 빈 공간에 답을 채워 보낸다. 여덟 살밖에 안 된 아들을 한 사람의 선비로 대하고자 한 자녀교육법이 배어난다. 주고받은 문장이 한 지면에 나부끼어 교감의 멋이 그윽하다. 옛 사람들은 부모와 형제, 친구, 친척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신과 마음을 키워나간 것 같다.   

어머니는 어질고 정이 많고 부지런하셨다. 우리 형제를 깊이 사랑하며 온화하셨지만 단호하게 엄한 데도 있었다. 어머니를 유달리 좋아하는 한편 어렵기도 했다. 일곱 딸 중의 외동인 아버지는 전형적인 '오냐, 오냐'의 유형 속에서 성장하셨다. 총명한데다 착하고 올바른 성품이었지만 성격이 급하고 까다로우셨다. 

우리에겐 좋은 아버지였지만 어머니에겐 받들어야 할 남편이었다. 치마저고리가 잘 어울리는 어머니의 하얀 버선발은 구들장 같은 삶의 무게를 안고 언제나 동동거리셨다. 

여고 1학년 여름방학 동안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집에 있었다. 끝없이 울어대는 개구리소리가 까만 어둠을 꽉 채운 그 밤에 별무리는 이마까지 내려와 쏟아질 듯 글썽댔다. 별빛 때문이었던가 아니면 모깃불 향이 마당 가득 퍼져 있는 그 밤이 적막해서였을까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가만가만 우물가로 나가 두레박으로 물을 퍼서 얼굴을 담갔다. 언제나 밝으신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는데 가슴이 뭉클해졌다. 얼굴을 북북 문질러 씻고 호롱불 밑에서 동생한테 편지를 썼다.

'…우리를 위해서 한없이 애쓰시는 어머니다. 가여운 여인이다. 너와 내가 어머니 말씀 잘 듣자…' 동생에게 쓴 최초의 편지였고 어머니를 언급한 난생 처음의 편지글이었다. "영주가 어느새…" 중얼거리며 편지를 읽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셨단다. 

"엄마가 진짜 좋아하시데." 동생의 낮지만 힘 준 속삭임에 가슴이 출렁하며 놀랐다. '어머니가 우시다니!' 생각나는 대로 무심코 쓴 편지인데. 감동하시는 어머니가 내 안에 따스하게 들어왔다. 이상하게 어머니한테 느끼던 어려움이 녹아내리며 그 자리에 어머니로 향한 애틋함이 스며왔다. 어머니를 강하게 사랑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였다.

동네에서 호랑이로 소문난 할아버지는 성품이 별난 분이셨다. 외동아들에서 난 귀한 손자, 손녀라고 우리를 아껴 주셨지만 나와 여동생을 남동생과는 차별 나게 대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늘 '여식아아가, 여식아아가' 하시며 규제와 제재가 많았다. '여식아아'는 앉음새가 고와야 하고 걸음새는 다소곳이 반듯하게 걸어야 하고 수저질은 조용조용해야 하고 마루에 앉을 때는 걸터앉으면 안 되고 등등… '여식아아'가 지켜야 할 것이 수도 없이 많았다. 

여고 2학년 봄 새 학기 때 어머니가 아프셨다.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가 약을 지어 부친 소포에 동봉된 '아가 메누리 보아라'로 시작된 할아버지의 붓글씨 편지가 있었다. 어머니 머리맡에 있기에 생각 없이 펴 보았다. 어머니를 염려하시는 할아버지의 글을 읽어 가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딸자식인 손녀 둘을 잘 키우려면 '메누리'가 오래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들 위하는 세상이어서 아들은 모두가 정성을 들여 잘 키우지만 딸들은 어미가 없으면 소홀히 되어 잘 자랄 수가 없다고 쓰여 있었다. '영쥬 광쥬 불쌍타. 메누리가 오래 살아서 저 여식들을 잘 키워야 한다. 여식이기 때문에 더 잘 보살펴야 한다.'던 구절의 글자들이 지금도 선명하다. 딸이어서 억누르고 차별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딸자식을 여성스럽게 가르치시겠다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가슴 복판으로 감동이 빛줄기처럼 지나갔다. 

할아버지 사랑방에는 커다란 벼루 함이 놓여 있었다. 남으로 드는 햇살을 받으며 벼루에 물을 떠서 먹을 갈고 한지에 한자 한자 써내려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득히 떠올랐다. 어떤 훌륭한 훈계를 들었을 때보다 내가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마음 깊은 곳에 굳게 차올랐다.

사춘기에다 입시 공부에 얽매인 똑같은 날의 반복으로 마음은 앞뒤 없이 찌푸려지던 시기였다. 일탈을 꿈꾸며 조용히 앉아 있어도 교복 칼라 밑의 가슴 속은 하릴없이 흔들리고 모든 것에 미성숙했던 그 시절. 내 존재의 가치부여를 인식하는 하나의 계기였다. 

일상 속에 흘러나온 편지 두 통은 나에게 분명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간직하게 했다. 말보다 글이 강한 건, 영혼의 결을 따라 마음으로 꾹꾹 눌러쓴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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