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향
말 향
  • 울산신문
  • 승인 2018.10.1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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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선 수필가

새댁 적의 일이다. 돌아가신 시 백모님께서 방문했을 때였다. 둘째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몹쓸 소리 했더니 '화내지 않게 마음을 다잡으라'고 하셨다. 그 이후 화가 쉬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그분을 생각하며 자제를 하려 애쓴다. 

그분은 아이들 이름을 어질게 살라고 '어진이'라 지어 주시고 착해지라고 '착한이'라고 별명을 지어 부르길 좋아했다. 식구가 많아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막내 시 숙모님 댁의 사촌 동서가 낳은 아기에겐 '화목동이'라는 별칭을 지어주셨다. 

이제 내가 그분의 말과 행동을 본보기 삼아 노력해야 할 때다. 

참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치료명상법을 통해서 몸 따라 마음이 가고 마음 따라 몸이 가는 것을 배운다 한다. 굳이 배워서가 아니더라도 감정의 동물임이 입증되듯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물을 대하면서도, 나의 감정 변화에 따라 매번 다르게 대한다. 

그럴 때마다 생전에 시 백모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린다. 말과 행동이 반듯하여 편안한 분이었다. 그분은 정직하고 진솔하며 바라보는 눈빛은 언제나 따스했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말의 속도가 적당하여 듣기가 편했다. 하물며 맞잡은 두 손엔 온기마저 흐르는 분이었다. 

그분은 내게 우리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자식은 자식 공부를, 어른은 어른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서로에게 독을 뿜는 소리를 말라고 했다. 내게 겸손한 자세로 상대를 대하란 말이었을 게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좋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있다. 말이 맑고 행동이 올바른 사람이다. 딱히 사람의 마음을 잘 어루만지거나 칭찬을 잘해서도 아니다. 마주하고 있으면 허브 향을 맡은 듯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 

대부분 허브는 햇볕을 좋아하는 식물이다. 다정한 손길로 물을 주고 볕 바라기를 시켜주는 사랑을 베푼다. 그 사랑은 깊이 잠을 잘 수 있도록 유도하며 받은 사랑을 온몸으로 내게 전해준다. 말 대신 몸짓으로 사랑을 보낸 대가일 것이다. 사람을 대함도 이와 마찬가지다. 상대를 다정한 말과 부드러운 행동으로 대하면 반사의 조건으로 내게도 보드랍게 다가온다. 

현관에 허브 화분 하나를 뒀다. 작년 가을, 남편이 지인에게서 얻어 온 것이다. 그날 남편에게서 상쾌한 허브향이 났다. 은은한 솔 향이 나는 로즈메리 화분을 들고 들어 온 생경한 남편에게 고마워한 마음과는 달리 '어머 별일이네!'라고 해 버렸다. 뱉어내기 바쁘게 후회를 했다. '당신 참 멋쟁이네.' 하고 말을 해 줄 걸 하고.

'말을 하는 사람은 한 마디 말을 하기 전에 천 마디 말을 제 속에서 먼저 버려야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은 한 줄 글을 쓰자면 백 줄을 우선 제 손으로 깎아 버리지 않으면 안 될 현실이다…'라고 사상가이며 민권운동가인 함석헌이 말했다. 

굳이 그 말을 인용치 않더라도 이만큼 살았으면 스스로 깊어져 말 향을 낼 줄도 알아야 할 텐 데 쉽지 않다. 따라서 표현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 말 없는 눈빛으로 마음을 헤아려 줄 줄 아는 사람에게서 허브 향 같은 좋은 향을 느낀다. 

꼭 몸으로 실천하고 입으로 말을 해야만 소통되는 관계가 아닌, 묵은 정만으로도, 어눌한 눈빛만으로도, 느낌이 통하는 사람이 좋다. 그래서 오래된 야생의 허브 향을 풍기는 사람이 좋다. 그는 함께한 세월의 옷에 묻은 소소한 보풀의 느낌까지도 보듬어 안아 줄 부드러운 말 향을 지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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