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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오후 한때

서숙희

발 고운 참 빛으로 머리 빗고 앉아서

두어 됫박 햇살을 치마폭에 쏟아놓고

한 생애 뉘를 고르듯 설핏 기운 이순 근처

△서숙희: 1992년 매일신문, 부산일보 시조 등단. 시집 '물의 이빨' '아득한 중심' '손이 작은 그 여자' '그대 아니라도 꽃은 피어'가 있음. '백수문학상' '김상옥시조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등 수상.
 

이서원 시인
이서원 시인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를 일러 이순(耳順)이라 한다. 시인도 어느덧 이순의 근처에 와있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월령가로 읽을라치면 시월 즈음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타인의 작은 말에도 귀가 간지럽고 이웃 간의 소소한 말의 실수에도 마음 아파 잠을 못 이루던 그런 날들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제 초록 잎에 물이 빠지듯 서서히 옅어져 가고 모든 것의 이해 폭이 확장되어 이목(耳目)으로부터 초연해지기까지 하는 걸 본다.
삶이란 어쩌면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부터 그 너머를 건너갈 때 비로소 평온해지리라. 저쪽에선 이쪽이 보이지 않고, 이쪽에선 저쪽이 보이는 서로의 적당한 경계의 발을 쳐 두었지만 그것은 소통의 부재가 아니라 마치 연륜의 깊이로 보여 지는 건 왜일까. 
툇마루에 앉아 빛이 이만큼 길어져 무릎에 닿을 때 발 사이로 빠져나오는 햇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 빛으로 머리를 매무새 한다는 건 얼마나 생이 여유로워야 하는 것이지 알 것만 같다. 그것도 두어 됫박 햇살을 치마폭에 쏟아놓는 오후 즈음이면 그 곁으로 흐르는 바람과 하늘의 하얀 구름과 새소리들은 물론 덤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짙어지는 햇살의 깊이와 무게, 그 너머로 한 생의 뉘를 고르듯 설핏 기우는 풍경의 단면이 보여주는 엽서 한 장 크기의 이미지가 갖는 의미는 실로 아름답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이 시의 본령이고 기본이다. 작은 것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심상(心象)이 가공할 만한 확장성을 가질 때 시는 살아있고 깊어지는 것이다.
시나브로 계절은 붉어지고 있다. 스스로의 모습에 초연해지고 떠날 때를 준비하는 은자처럼 안온하다. 시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시를 앞에 두고 참 따뜻한 햇살 한 모금 들이키며 먼 산을 우러르는 모습이랄까.
은은하게 마당 귀퉁이로 쓸려가는 바람처럼 서 있고 싶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툇마루 앞의 발이 걷어지고 참 고운 저 여인과 눈길이라도 마주친다면 어쩔까. 붉게 익은 월하감 몇 개를 따내려 하얀 접시에 담아내며 "가을이 익어 가네요" 라며 내 쪽으로 밀어줄 것만 같다. 이순의 근처는 모든 것이 조금 더 붉다.  이서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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