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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다다다."

이것은 쥐가 달음박질하는 소리.

"와다다다다."

이것은 쥐를 쫓아가는 고양이 소리.

<톰과 제리>가 아니다. 우리 집 천장 위의 쥐와 고양이 이야기다. 어릴 때 우리는 '나비'란 이름의 검정과 회색이 섞인 줄무늬 고양이를 길렀다. 농사를 지으니 부엌이나 창고에 쥐가 자주 출몰했는데, 이 쥐들은 밤이 되면 안방 천장 위에서 시끄럽게 달리기를 했다. 쌀알이나 멸치에 쥐약을 버무려 놓아두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참다못한 어머니가 천장 도배지가 내려앉은 틈으로 나비를 올려 보냈다. 

우다다다. 와다다다. 쥐는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나비는 열심히 쥐를 쫓는 듯 했다. 몇 차례 소란스런 왕복달리기가 끝난 뒤 천장 위는 조용해졌다. 나비가 드디어 쥐를 잡았나?

그런데 얼마 뒤, 우당탕퉁탕 요란한 굉음이 울리고 천장이 중간에서 찢어지더니 나비가 털썩 방안으로 떨어졌다. 나비는 입에 거품을 물고 펄쩍펄쩍 뛰고 구르며 온 집안을 헤매 다녔다. 아, 쥐약 놓은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천장 위에 올려 졌던 나비는 쥐 대신 쥐약을 먹어버린 것이다. 입가에 부글거리던 거품, 비틀거리며 마당에 와서 쓰러지던 모습, 타오르듯 이글거리다가 천천히 꺼져가던 눈빛, 거칠게 내뿜다가 찬찬히 잦아들던 숨. 나비는 오래 고통스러워하며 천천히 죽어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다시는 고양이를 기르지 않으셨다.

이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것은 우리 아파트 근처에 살고 있는 길냥이 때문이다. 요즘 들어 아파트 뒤쪽 산기슭에 못 보던 고양이 한 마리가 돌아다니는데 줄무늬며 얼굴 생김새며 크기가 나비를 닮았다. 하긴 평범한 고양이니 고만고만 닮아 보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대개 길냥이는 꼬리가 바퀴에 치어 뭉툭하게 잘려있는데 비해 이 고양이는 꼬리를 온전히 갖고 있다. 아직 세상의 호된 신고식을 치르지 않은 모양이다.

사노 요코가 지은 『백만 번 산 고양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한때 임금의 고양이였다가, 뱃사공의 고양이였다가, 서커스단의 고양이였다가 그렇게 백만 번이나 윤회를 되풀이하던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고, 하얀 고양이가 죽자 그 옆에서 자신도 조용히 눈을 감는다는 내용이다. 맨 마지막 문장이 마음을 울린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뒷산 길냥이가 나비의 환생일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나비든 길냥이든 고단한 묘생의 여정을 지나는 중이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고양이를 '신의 걸작'이라고 하였다. 다빈치는 온갖 고양이의 포즈를 스케치하였는데 정작 채색화로 완성한 것은 담비였다. <흰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속에 나오는 흰 담비는, 눈이 호기심에 반짝거리는 것이 하얀 고양이를 닮았다. 반짝거리는 그 눈을  이장희 시인은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눈'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털, 고요히 다문 입술, 날카롭게 쭉 뻗은 수염으로 고양이의 모습을 묘사해간다. 나는 여기에 활처럼 둥글게 굽은 등과 밤새 내리는 눈처럼 조용한 발소리, 물결치듯 매끄럽게 움직이는 꼬리를 덧붙이겠다. 이처럼 고양이는 어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동물이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에서 고양이는 다산의 여신으로 추앙 받았고 죽으면 미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걸작들의 운명은 너무 다르다. 주인이 집사처럼 시중을 들고 돌봐주는 고양이가 있는가 하면 자동차 바퀴에 꼬리가 잘려 엉덩이 쪽이 허전한 고양이도 있다. 고양이의 꼬리는 균형을 잡고, 체온을 조절하고, 기분을 표현하는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꼬리를 잘린 고양이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워, 나비가 천장 아래로 떨어지듯 묘생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일찌감치 떨어져 내린 것 같다.

그 고양이들은 수명도 아주 짧다. 집고양이의 평균 수명이 15년 정도인데 비해 길냥이는 3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파트 근처에 자주 나타나던 노란 고양이, 검정고양이, 얼룩 고양이들이 안 보인지 꽤 된다. 그 대신 낯설고도 낯익은 줄무늬 고양이가 자리 잡은 것이다.

사노 요코의 책에서 백만 번 산 고양이는 도둑고양이였을 때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자기만의 고양이가 된다. 그동안 누군가의 옆에서 조그맣게 등장하던 고양이는 비로소 커다랗게 지면을 압도하며 나타난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고양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도둑고양이는 굶주림과 폭력 앞에서 비틀거리고 자신이 자리 잡은 아파트 뒤편의 산기슭처럼 경계에서 주춤거린다. 산과 아스팔트의 경계, 야생과 인간계의 경계, 꼬리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서. 

줄무늬 고양이가 부디 꼬리를 오래 지니고 있길 바란다. 주어진 수명을 최대한 누리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길, 그리고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길' 빈다. '신의 걸작'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보는 사람도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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