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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아앙~~~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널 만큼 빠른 속도로 울산의 미래를 열었다. 딱 8년전이다. 울산에 KTX 시대가 열린 것은 2010년 11월1일이다. 

그 때부터 울산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동해남부의 변방에 있던 울산이 고속철도와 함께 내륙 생활권의 축으로 편입됐고 기차표 하나로 전국의 대부분 도시들과 반나절 생활권으로 묶였다. 문제는 코레일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애초에는 철도역조차 없다가 여론에 밀려 급조된 울산역이기에 코레일은 울산을 서자 취급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승객이 급증하고 수익성이 좋아지자 아차 싶었지만 그래도 제대로 울산역의 미래를 보지 않았다.

제대로 보기는 커녕 돌아앉아 짭짤하게 수익성만 계산했고 시설증축이나 미래를 위한 투자는 자린고비 시늉만 했다. 그럼에도 울산의 고속철도 편입은  울산으로서는 사회문화적 이정표라 할 만한 일이었다. 1,000년전 한반도 유일의 국제 무역항으로 시작한 해양문화권과의 네트워크가 대륙문화권으로 확장하는 엄청난 계기가 마련된 셈이었다.  

기차는 외관의 육중함과 천지사방을 진동하는 기계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서정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이동수단이다. 걷다가 뛰고, 말을 달리다 화석연료로 이동수단을 대체한 것은 고작 두 세기 전이다. 문제는 이동수단의 변화가 사람과 동물에서 기계의 힘으로 변한 동력이 아니다. 기계의 이용은 두 세기 만에 수십 수백세기 인류사의 변화 속도를 앞질러 '순간이동'의 가능성까지 점쳐지게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여전히 한 세기 전에 머물러 있다.

울산과 부산이 불과 15분대, 서울은 2시간대의 속도로 다가왔지만 기차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삶은 달걀'과 칙칙폭폭의 아련한 추억의 정거장에 앉아 있다. 기차는 그렇다. 대합실의 어수선함 속에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고 직선으로 다가오는 미래의 시간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여유가 뒤섞인다. 그래서 기차여행은 다른 어떤 여행보다 매력적인 추억의 부스러기를 흩날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육지동물의 기차 격인 말이 인간의 육상이동에서 가장 편리한 시대였던 수송의 역사는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 발명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항구도시 리버풀과 방직공업으로 유명한 맨체스터를 연결한 철도가 그 시작이었다. 그 때가 1829년이었으니 벌써 200년 전의 이야기다. 최고속도 시속 21Km의 증기기관차는 둔탁하고 육중한 몸집에다, 그다지 빠르지 못한 속도로 출발했으나 불과 한 세기가 지나면서 유럽대륙을 하나로 만들었다. 지금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이동수단이 된 유로패스는 유럽 21개국의 국유철도를 통합한 철도다.

문제는 국유철도의 통합이 아니라 철도의 개방이 가져온 여파였다. 두차례 세계대전과 뿌리깊은 지역색을 가진 유럽은 철도로 통일되면서 서서히 융합의 길로 갔고 어느새 거대 공동체로 발전했다. 미국의 세계국가 건설에서도 철도는 엄청난 역할을 했다. 영국의 초기 철도기술을 고스란히 가져온 미국은 부분적으로 철도를 이용했지만 본격화 한 것은 남북전쟁 발발 이후였다. 이른바 골든러시와 궤를 같이한 미국의 대륙횡단철도는 1862년 태평양철도법의 서명으로 시작됐다. 이 거대 사업의 시작을 알리는 법안 서명을 링컨이 했다. 링컨의 서명으로 시작된 미국 대륙횡단 철도는 이후 33만 8,000Km의 철로를 미국 대륙에 깔아 물류와 사람을 실어날랐고, 철도가 낳은 부가가치와 국부의 누적은 미국을 세계 일등국가로 올려 놓았다.

우리에게 철도는 수탈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아픔이 깔려 있다. 일제는 한반도에서 생산된 물류를 본국으로 수송하는 이동수단으로 철로를 깔았고, 식민통치 기간 내내 철도부설을 가속화했다. 하지만 울산은 동남부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경부선의 축에서 제외된 채 변방의 항구로 남게 됐다. 철도의 역사에서 후발주자였던 울산에 철도가 들어온 것은 1921년 10월 25일이다. 조선중앙철도 울산~불국사 구간이 개통되면서 철도시대를 맞았지만 철도의 중심인 경부선축에서 열외였던 까닭에 대한민국 철도역사의 주변도시에 머물러야 했다.

최근 문재인 정부는 남북간에 단절된 철도를 연결하는 작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러시아와는 이미 시베리아 철도의 단일화에 합의한 상태다. 세계 최장의 철도인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러시아 제정 말기인 1891년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구상에 따라 착공돼 10년 만인 1901년에 완공됐다. 모스크바에서 극동의 블라디보스톡까지는 9,288km 종착역인 나호트카 항까지의 총연장은 9,441㎞로 지구에서 가장 긴 철도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는 6박 7일,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는 6박 6일이 걸린다. 총 구간의 시차는 7시간에 이르며, 모스코바 시간을 기준으로 운행하고 있다. 바로 이 철도가 울산과 연결될 수도 있는 시대가 왔다.

기차는 단순한 이동의 수단을 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특별한 문명의 도구다. 근대화의 상징이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였다면 기차가 닿는 곳은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창조와 생성의 공간이 됐다. 그 생성의 코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영화다. 많은 영화 속의 안타까운 이별이나 반가운 재회,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극적인 순간들이 기차역에서 명장면으로 변용되고 그 장면의 궤적을 따라 이방의 사람들이 기차역 주변을 맴돈다.

아주 오래전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열연한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단연 기차와 기차역을 소재로 한 최고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소르본느 대학생인 셀린느가 부다페스트역을 떠나 파리로 돌아가는 길, 미국인 청년 제시와 우연한 만남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차만이 가진 왁자한 소란 때문이었다. 실연의 상처를 안고 비엔나로 향하던 제시와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던 셀린느의 운명은 비엔나역에서 갈린다. 꿈꾸는 소년 제시의 서툰 사랑이 비엔나역과 그 주변 풍경과 어울려 해가 뜰 무렵까지 셀린느의 감성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끌림과 절제의 묘한 긴장이 철도 레일처럼 평행선을 그을 동안 영화에 집중한 관객은 정해진 레일처럼 다가온 이별의 순간에 가슴 한켠을 쓸어내리는 찰나, 기차는 멈춘다.

어디 이 뿐인가. 어린시절의 모든 것이 질퍽한 고향 땅과 영화에 눈을 뜨게 한 영사기사 알프레도 아저씨에게 작별을 고하던 '시네마 천국'의 토토도, 사위를 짓누르는 우울함이 자신을 죄어오면 언제나 기차역으로 달려가 탈출을 꿈꾸던 '디아워스'의 여류시인 버지니아 울프도, 불후의 명작 '카사블랑카'의 릭과 일자도 모두 기차역에서 사랑을 만나고 이별을 보내야 했다. 바로 그 영화의 무대가 철도역이다. 
 
기차역은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도시의 관문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 기차역이고 또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기차역에는 여행안내소와 열차안내소, 은행, 환전소, 화장실, 매점, 샤워시설, 락커, 레스토랑 등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 늦은 시간이나 이른 시간에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굳이 유럽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된다. 서울이나 부산, 그리고 대전이나 대구도 철도는 도심과 함께 호흡한다. 일본의 신칸센 역시 도심의 숨결이 스며드는 곳에 역사가 있다. 많은 도시들이 철도역을 도심에 두는 것은 관광산업의 유치 때문이다. 

울산역은 이제 8년이 된 철도역이다. 처음부터 유럽의 기차역을 기대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울산역의 경우 태생적으로 도심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입지도 아니고 편의시설이나 여행문화 인프라가 구비되지도 않았다. 그냥 지나치려는 고속철도를 시민들의 열의로 서게 했고, 뒤늦게 역사도 만들었기에 엉성한 면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과거의 일이다. 그 때 제대로 했어야 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푸념에 불과하다. 지금부터 제대로 만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훗날, 울산역을 무대로 비포 선라이즈나 시네마천국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역을 만들어야 한다. 울산역의 여객전용 면적은 전국 KTX역 중 두 번째로 좁다. 같은 시기 개통한 오송역보다 이용객은 3배 많지만 여객전용 면적은 오송역의 4분의 1수준이다. 코레일이 울산역에 집중적인 투자를 해야할 이유는 분명하지만 시늉만 하고 방치하고 있다. 마지막 열차가 도착해도 대중교통이 없는 도시, 편의점 이나 식당가가 문을 닫아 유령처럼 변하는 대합실이 울산역의 현주소다. 역 앞의 유흥시설이나 모텔들은 네온사인을 번쩍거리는데 코레일은 울산역이 벌어주는 수익에 단물만 빨고 앉아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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