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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언제 왔나 싶게 벌써 가을의 끝자락이다. 그래서 인지 가을이 가기 전에 형형색색의 알록달록한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단풍보다 예쁜 옷을 입고 산으로 달려간다. 아쉬운 가을의 끝자락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는 이들과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을 즐기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근교의 산책할 만한 장소를 소개한다.

조선 문종(1414~1452년)의 서녀이자 소헌왕후 심 씨의 손녀 경숙옹주(敬淑翁主, 1439~1482년)의 태실(胎室;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시는 작은 돌방) 및 태비(胎碑; 태실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실 앞에 세운 비석)는 범서읍 사연리에 위치해 있다. 태실과 태비는 지난 2014년 12월 16일 울산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으며, 울산지역에는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실 및 비는 1485년(성종 16)에 세웠다. 태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시는 작은 돌방이며, 태비는 태실이 있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실 앞에 세운 비석이다. 예로부터 왕실의 번영과 왕실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전국의 이름난 산에 태실을 만들어 태를 묻었다고 한다. 태비 앞면에는 '왕녀합환아기씨태실(王女合歡阿己氏胎室)', 뒷면에는 '성화이십일년팔월초육일입(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이라고 적혀 있다. 태실은 1970년 초에 도굴됐으나, 이후 태항아리 2점과 태지 1점을 되찾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과기원 후문 쪽에서 경숙옹주 태실 및 비를 알리는 표지판을 보고서 논 사이에 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얕은 야산이 나온다. 가을이 내려와 있는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또 하나의 표지판이 나온다. 조금 더 걷다보면 커다란 개가 짖어대는 집이 나오고 약간 더 가다보면  태봉산만디를 알리는 옛길 안내판이 있다.

거기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세 개의 무덤이 있는 산소가 있다. 산소 위쪽 작은 오솔길을 따라서 올라가다 보면 커다란 소나무가 넘어져 언제 죽었는지 모른 체 쓰러져 있다. 약간 더 올라가면 조금은 미끄러울 수 있는 언덕이 나오는데 그곳을  지나면 숨도 차기 전에 목적지에 다다른다. 태실 및 비에 들어서면 비가 자리 잡고 있는 곳에 민묘가 설치되어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경숙옹주 태실인가 생각이 들게끔 한다.

태실 및 비 주위에 나무들이 우거지고 크게 자라 맑은 가을 하늘만 볼 수 있을 뿐 바깥을 잘 볼 수 없다. 주위를 가리고 있는 나무들로 인하여 시야가 확보 되지 않아 이곳 주위가 경치가 좋은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오르면서 보았던 주위의 넓은 들과 사연댐에 막혀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 근처에 지금은 사라져 버린 관서정이 있었음 안다면 분명 명당임을 알게 된다.

태실 및 비는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누군가에 의해 도굴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도굴된 물품들(태실·태지·항아리)을 찾아 국립중앙 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명당자리임을 알고 이곳에 조상묘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비만은 500년의 역사를 지나는 동안에도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듯 그렇게 꿋꿋이 서 있다.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라고 말한 알베르 카뮈의 두 번째 봄을 즐기지 못하고 아쉬운 이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까운 근교의 문화유적을 찾아보며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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