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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본의 단편소설의 귀재라 일컫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1892~1927)의 작품 『거미줄)』(1918)에 등장하는 칸다타라는 주인공을 만나보고자 한다. 

지난번에 소개한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코(鼻)』를 쓸 때, 조만간에 『거미줄』에 대해 써야지라고 생각해서 인지 계속 내 머리 속에 맴돌고 있어서 오늘 이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도 아쿠타가와의 단편소설을 아주 좋아한다. 

『거미줄』은 불교설화에서 힌트를 얻어 쓴 소설로 극락과 지옥이 잘 그려져 있는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단편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당시 일본에서는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고, 이어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까지 실리게 됐다. 그만큼 『거미줄』은 일본에서는 어린아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극락에서 연못가를 산책하시다가 연꽃 사이로 보이는 지옥을 바라다봤다. 지옥에서 칸다타라는 죄인이 다른 죄인들과 함께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칸다타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한 악독한 도둑이었는데, 단 한번 좋은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날 숲 속을 지나가다 작은 거미 한 마리가 길가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여 밟아 죽이려고 했는데, "아무리 작은 것이지만 생명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밟아 죽이는 것은 불쌍하다"고 해 그냥 살려주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칸다타가 이런 일을 한 것을 기억하시고는 칸다타를 구제할 생각으로 연꽃 위에 있던 거미를 살짝 집어서 지옥을 내려 보냈다. 지옥에 있던 칸다타는 자기가 있는 쪽으로 거미줄이 내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하면서 거미줄을 잡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열심히 올라오면서 잘 하면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고, 어쩌면 극락까지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 올라와서 잠시 쉴 생각으로 자기가 올라왔던 밑을 내려다봤다. 지옥은 어느새 보이지도 않았다. 칸다타는 지옥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 좋아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까 자기 뒤를 이어 거미줄을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 아닌가. 

칸다타는 자기 한 사람으로도 견딜까 말까한 거미줄에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무사히 올라 왔는지 의아해 하면서, 만약 거미줄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므로 그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죄인들! 누구 맘대로 올라오는 거야. 내려가!"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그 순간 거미줄이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칸다타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부처님은 이러한 칸다타의 모습을 보면서 슬픈 표정을 지으며 연못가를 거닐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이야기다. 게다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도 알 것만 같은 쉬운 내용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그림이 저절로 그려지는 환상적인 분위기와 상징성은 어린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데에는 충분히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년 전에 <일본문학의 이해>라는 전공 수업 시간에 이 작품을 읽고 토론한 적이 있다. 학생들의 첫 질문은 "부처님이 너무하시네요. 구해주시려면 끝까지 구해주시지"하는 것과 "극악무도한 칸다타가 딱 한 번 거미 한 마리 살려준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요"등이었다. 

이때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불교의 깨달음에 의한 '자기구제'라는 측면일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불교에서는 절대자에 의한 <(타인)구원>이란 개념은 없다. 자각적인 선업실천에 의한 <(자기)구제>가 있을 뿐이다. 

칸다타가 거미를 밟아 죽이려고 하다가, "아무리 작은 것이지만 생명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밟아 죽이는 것은 불쌍하다"고 깨달아 거미를 살려준 것에 초점을 맞추어도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고 깨닫고 실천하는 것과 깨닫지 않고 우연히 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본다. 칸다타를 통해 나 혼자만 잘 살겠다는 생각 보다는 우리 모두 함께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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