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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韓醫)에서 상처가 난 신체부위는 완전히 곪아서 터져야, 비로소 새 살이 돋는다고 했다. 환부(患部)가 진행되고 있을 때는 배농(排膿· 곪은 것을 째거나 따서 고름을 빼냄)을 위한 고약 처방이 전부다. 이는 완전히 곪아 터지는 시간을 앞당기는 최종치료의 전단계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세상만사의 이치가 이와 같은지 모른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려 하면 공연히 힘만 빼고 성과는 미미하다. 지난 87년 노동조합 설립 원년을 기점으로 지난해까지 20년 동안 94년 단 한 해만 무분규를 기록했을 뿐, 끊임없는 분규를 겪어야 했던 현대자동차울산공장도 이런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사상생, 평화의 길로 가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였다. 노동시장이 경영자, 강자 논리로만 휘둘리던 세월들에 대한 약자(노동자)의 화풀이이자 씻김굿이 노사분규로 분출됐다.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집단의 투쟁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최근에는 노사협상의 직접적 대상이 아닌 비정규입법 등 정치성 짙은 파업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치파업이 결국 고약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노사 간의 의견대립과는 전혀 딴판의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한 사건이 정치파업이었다. 명분도 없는 일로 협력업체와 지역, 국가 경제를 볼모로 파업을 벌이고 있는데 따른 당연한 심판이다. 지난 20년 간 누적된 손실 부분이 더 부각되게 된 것도 이런 패착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노사의 분쟁 현장에서 어느 특정 계층을 선과 악으로 확연히 구분할 수는 없다. 나름의 이유가 있고 정당성이 있다.

 

   정치파업 비난 '고약효과'
 문제는 경중에 있다. 누가 더 잘못이 많고 적은가다. 노조에 국민적 비난 여론이 집중된 것 역시 정치파업으로 더 많은 책임을 떠안게 됐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노조의 도덕성이 도마에 오른 것도 상당부분 작용했다. 그러나 현대차 노사는 이제 더 이상 여기에 묶여 있을 수 없다는 각성이 일고 있다. 모든 것을 대승적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생존이 위협받을 처지다. 현대자동차 노사가 8일 중장기적 노사신뢰 구축과 발전적 노사문화 토대 마련을 위해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노사 전문위원회를 구성한다는 데 전격 합의하고 이를 선포한 것도 바로 이런 절박감의 반영이다. 노사가 각 5인씩 추천한 노사문제 외부 전문가 10명으로 꾸려진 노사 전문위원은 앞으로 오는 2009년까지 노사 당면현안에 대한 포괄적 연구활동을 벌인다. 현행 주야 10시간씩의 2교대제를 각각 8시간씩 주간연속 2교대로 근무형태를 전환하는 문제를 포함 회사의 경쟁력 강화방안, 직원복지 부문, 협력업체 상생문제 등을 논의하고 이를 노사협상 테이블에 올려 최상의 결과물을 도출해낸다는 계획이다. 비록 전문위원회가 의사결정권은 없지만 모든 노사협상을 이들 의견을 바이블로 간주한다는 것이 노사합의 사항이다. 또 전문위원회의 활동에 노사 양측의 실무위원 각 5명씩이 수시로 참여해 연구활동을 지원하고 대안수립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중량감을 더 하게 하고 있다.
 현대차가 처한 최대의 과제는 상호불신을 어떻게 푸느냐에 있다. 오랜 노사분규로 쌓인 감정적 앙금과 적대감을 털어내야 하고 공생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노사 모두에게 거역할 수 없는 당면 화두다. 이날 발족한 현대차 노사전문위원회의 박태주 위원장이 여기에 대한 명쾌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는 현대차의 노사관계에 대해 "국민이 우려하고 불안해하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문제는 노사간 불신이 심해 변화 방향에 대한 타협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대화도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생산성향상과 같은 장기발전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노사간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이 급선무다. 또 일방이 주도하는 변화도 합의형 변화로 전환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노사전문위원 10인 구성
 그동안 노사 공히 핏대만 세우고 싸워왔지 노사정책토론회가 없었다. 현안문제 협의에 앞서 서로가 얼굴을 맞대고 격의없이 대화하는 시간만 주어졌더라도 노사불신의 골이 지금처럼 패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아무튼 현대차노사가 이런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 희망을 갖게 한다.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생의 길을 찾아보자는 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지난 98년, 대통령 자문기구로 출범한 노사정위원회에게도 한 수를 가르쳐줄 수 있는 노사화해의 전령이자, 봄바람으로 발전해 주기를 거듭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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