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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고 탈 많았던 화해·치유재단이 결국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정부는 어제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공식 발표했다. 화해치유재단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2월 한일위안부 합의에 따라 이듬해 7월 출범했다. 일본 정부는 재단 설립에 출연금 10억 엔을 냈다. 재단은 지금까지 생존 피해자 34명(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 시점 기준), 사망자 58명에게 치유금으로 총 44억 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정부는 위안부 합의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강경화 장관은 올 초 "할머니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2015년 합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문제해결이 될 수 없다"며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백지화했다. 강 장관은 이어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 기금 10억 엔은 전액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겠다"면서 "이 기금의 향후 처리방안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협의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출연금 반환에 방점을 두고 있으나 일본 측이 수령을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사에서 식민지배나 전쟁 등으로 국가간의 분쟁을 비롯한 국가와 개인간의 분쟁 등으로 진통이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는 일본과 동북아 및 동남아 국가간의 갈등이지만 이 보다 오래전 유럽과 아프리카, 유럽과 유럽의 갈등도 역사가 깊다.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식민 통치(1911~1943)했던 기간 동안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리비아인 7만여 명을 죽음으로 몰았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이 부분이 문제가 되자 이탈리아는 1956년 4월 '리비아 경제 재건을 위한 기여금' 명목으로 약 48억 리라를 건넸지만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가 이 협약을 깨고 더 많은 배상금을 요구하자 이탈리아는 "1956년 화해로 채무가 청산됐다"며 불응했다. 보복에 나선 카다피는 이듬해 리비아 거주 이탈리아인 2만 명을 국외 추방했다. 리비아에 매장된 석유와 가스가 필요했던 이탈리아는 1999년에야 식민 지배 책임을 인정했다.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뒀던 영국은 여러 국가로부터 사과와 배상 책임을 추궁 당했다. 케냐의 경우 1952년 마우마우족 봉기를 무력 진압한 것에 대해 2013년 사과했고, 비교적 적은 금액인 1,900만 파운드를 지급했다. 독일은 패전 이후 상당 시간이 흐른뒤 지난 1953년 연합국과 런던부채협약을 맺고 2차 대전 전쟁 배상을 일괄 타결했다. 하지만 나치 피해에 대한 국가 및 개인 배상, 강제 노동 피해자 배상 등은 별도로 이뤄졌다. 독일도 처음부터 배상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폴란드와의 갈등과 재단 설립 등은 대표적인 사례다. 1972년 독일과 폴란드는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이를 계기로 폴란드는 강제수용소 수감자와 강제 노동 피해에 대한 개인 배상 등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폴크스바겐이 직원 3분의 2를 폴란드 등 동유럽인을 강제 노동자로 충당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배상과 사과 문제가 급물살을 탔다. 결국 지난 2000년 독일은 '기억, 책임, 미래재단'을 만들어 강제 노동 피해자들에게 배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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