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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 검찰총장의 눈물이 화제다. 문 총장은 지난 27일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를 직접 찾아 과거 형제복지원(사진)에서 자행된 인권 침해와 관련한 검찰 수사가 축소·은폐된 데 머리 숙여 사과했다. 문 총장의 사과와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다시 부각된 형제복지원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형제복지원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군사독재 정권의 인권유린 백서다. 대한청소년개척단, 삼청교육대, 대구 희망원과 함께 1980년대를 상징하는 인권 유린의 막장이다. 무엇보다 형제복지원의 경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등 국제행사를 앞두고 거리의 부랑자 단속을 빌미로 관이 민간의 불법을 방조 지원했던 인권유린 사건이라는 점에서 다른 사건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사건이 표면화된 것은 우연이었다. '브레이크 없는 벤츠'로 유명한 김용원 검사(1986년 당시)의 눈에 문제의 현장이 들어온 것은 어느 휴일 오후였다. 1986년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김용원 주임검사는 포수와 함께 울산 청량 일대에 사냥을 나갔다가 수상한 작업장을  발견하고 수사에 들어갔다. 한 젊은 검사의 집요한 추적과 용기로 세상에 묻혀 있던 사건은 실체를 드러냈다. 결국 원장 박인근을 비롯해 관계자 5명이 구속됐다.

문제는 사건 보도 이후 전두환 정권의 태도였다. 정권의 압력을 받은 검찰은 500여 명의 희생자에 대한 진상규명도 제대로 못한채 사건을 덮었다. 당시 형제복지원에서 살해 또는 고문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원생수는 513명이었다. 시체는 암매장 또는 근처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돈을 받고 몰래 팔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증언이 나와 있다. 부랑아란 이름으로 끌려온 이들은 대다수가 그냥 길을 걷던 일반인이었고 납치되거나 유인 당해 시설에 갇혔다. 이같은 사실은 울산 작업장 수사 직후 1987년 3월 부산 주례 형제복지원 본원에서 수용자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울산 출신으로 처가에서 물려받은 보육시설을 부랑아 시설로 바꿔 형제복지원을 만들었다. 그는 4·19 혁명 당시 육군모부대 특무상사로 근무했고 군부와 인맥이 닿아 각종 이권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지는 인물이다. 그가 형제복지원을 통해 불법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1975년 박정희 정권이 대대적인 부랑아 단속을 위해 부랑아 시설에 막대한 국고를 지원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정권의 지원으로 매년 20억 원에 달하는 국고를 지원받아  고급 아파트나 콘도, 골프 회원권을 샀다.

또한 자신의 땅에 목장과 운전 교습소를 세운다며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시키며 하루 10시간씩 강제 중노동을 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1981년 국민포장 석류장,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 온갖 수훈을 받고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까지 역임했다. 12년 동안 지속된 불법으로 원장 박인근은 1,000억 원 대의 부를 축적했고 2년반의 수감생활 이후 풀려나 자신의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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