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른바 미식의 시대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행위이지만 그것을 생물학적 행위라고만은 볼 수 없다. 인간은 다양한 생물학적 행위들을 문화적 행위로 치환시켜왔다. 음식도 몸과 물질이 차지하는 시대적 의미에 따라 문화적으로 변화한다. 먹고 사는 것이 절대적 가치인 시대에는 음식을 많이 먹는 행위가 미덕이다.

풍만한 몸은 여유로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오늘날, 음식은 더 이상 희소 자원이 아니다. 음식은 본능적인 육체에서 독립해 스스로의 문화적 가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많이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음식을, 누구와 어떻게 먹는 것이 중요한 게 된다. 음식 맛을 중시하는 이른바 미식이라는 것이 나타나는 시점이 바로 여기다.

오늘날 미식에 대한 대중의 강렬한 욕구는 사회 곳곳에서 넘쳐난다. 최근 거의 모든 TV 프로그램의 주요 콘셉트는 음식이다. 뉴스, 드라마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음식을 먹는다. 심지어 여행 프로그램에서도, 여행지에서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느냐가 주요 내용 중 하나다. 소셜네트워크에서는 이른바 맛집 파워 유저가 넘쳐나고, 이들이 추천한 음식점은 그야말로 장사진을 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이 맛이란 것의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할까. '나이로 먹는 음식'이란 말이 있듯, 맛이라는 것은 세대·지역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다. 강한 양념에 길들여진 젊은 세대는 옅은 육수 맛을 자랑하는 서울의 유명 냉면집 냉면이 맛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소셜네트워크에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네가 냉면 맛을 알아?'하는 비난이 폭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유명한 한 푸드 컬럼리스트는 '전라도 음식은 맛이 있다고 하니까 맛있는 것이다'고 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면 '전라도 음식이 맛이 없다는 말이냐?'라는 것이 그 비난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 해프닝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전라도 음식은 맛있다'라는 사회적 통념이다. 이 통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아마도 다른 지역에 비해 평균 이상으로 맛이 있는 전라도 음식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쌓이고, 그 이야기가 여러 통로로 전파되고, 대중에 각인됐을 것이다. 그래서 (맛의 절대적 기준이 있다면) 별로 맛이 없을 어떤 전라도 음식도 전라도에 있기 때문에 맛있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이야기가 맛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음식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싫어하던 음식도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일본 만화 '미스터 초밥왕'은 출간 이후 일본 요리 만화의 전형이 됐으며, 이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는 '먹방'의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이 만화는 발간 당시만 해도 고급요리에 속했던 스시에 대해 독자들의 무한 식욕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신선한 식재료의 맛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기발한 요리법과 시식장면은 스시를 좋아하지 않던 사람까지도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특히 시식 후 맛에 대한 화려한 표현들, 즉 '입안에 확 퍼지는 바다의 청량함', '녹진한 성계 알의 농후한 맛' 같은 미사여구는 일본 스시는 도대체 어떤 맛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최근 들어와 음식은 지역관광의 중요 이정표가 됐다. '먹방 투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음식은 지역 마케팅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각 지자체에서는 지역의 맛있고, 특색 있는 음식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울산도 그동안 많은 음식을 발굴해 냈다. 그렇지만 그 노력만큼의 성과는 얻지 못해 안타깝다. 필자는 이 음식들에 이야기가 담겼으면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음식의 유래나 정보 제공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듣는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돼야 한다. 듣는 이의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기억 안에서 재해석되는 이야기가 돼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맛은 이야기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먹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