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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 민속, 신앙 등에 관한 풍속이나 우리 민족의 기본적인 생활문화 특색을 나타내는 것 중 중요한 것들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관리한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울산의 문화재로는 '학성 이천기 일가묘 출토복식'과 '정공청 유품' 등이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7호 학성 이천기 일가묘 출토 복식은 조선 중기에 봉직랑(奉直郞)을 지낸 이천기(李天機: 1610~1666)와 그의 부인 흥려 박씨(1605~1672)의 합장묘, 이천기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李之英: 1642~1666, 무과 급제), 그의 부인 평해 황씨(平海 黃氏: 1637~1718)의 합장묘에서 나온 유품들이다.

유물은 총 10점으로 광다회대, 면포솜 소모자, 명주솜 소모자, 면포솜 장옷, 면포 홑치마, 옷감, 난봉화문단 겹장 옷, 명주솜 누비치마, 면포솜 버선 등이 있다. 이 유품들은 1969년 여름 신정동 판교(현 학성고등학교 자리)에서 학교 부지를 조성하면서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됐다. 석고로 관의 둘레를 밀폐시킨 장묘 법을 취했기 때문에 300년이 지났음에도 복식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수습과 동시에 유물은 월진문회 사무실 진열장에 보관돼 오다가, 2004년 3월 24일부터 국립경주박물관에 기탁됐다. 그 후 울산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2011년 6월 8일에 울산박물관에 기증됐다.

국가민속문화재 제37호 학성 이천기 일가묘 출토복식 중 난봉화문단 겹장옷.
국가민속문화재 제37호 학성 이천기 일가묘 출토복식 중 난봉화문단 겹장옷.
국가민속문화재 제38호 정공청 유품 중 장갑, 혁대, 화살.
국가민속문화재 제38호 정공청 유품 중 장갑, 혁대, 화살.

국가민속문화재 제38호는 정공청 유품 12점이다. 정공청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했다. 울산, 서생포, 기장 등지에서 100여 배에 달하는 왜군들과 싸워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공을 세웠으며 이 때문에 그는 1등, 그의 아들은 2등 공신에 책봉됐다. 이 유물들은 장군이 임진왜란(1592)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용했던 투구와 갑옷, 장갑, 혁대, 도검, 화살 등의 유품이다.

유물은 후손인 장철환 씨가 간직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울산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유물들은 조선시대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원 모양의 철로 만든 투구는 부식이 심한 상태지만 원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정면에는 앞쪽으로 3㎝, 길이로 17㎝ 정도의 해가리개를 양끝과 가운데 못을 박아 달았고, 목가리개가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것은 '세종실록' 중 '오례(五禮)' 중에 나오는 병기(兵器) 가운데 원두(圓兜)와 비슷한 모습이다. 갑옷은 남자들의 겉옷인 포의 형태를 하고 있다.

겉은 화려한 초록색이고 안은 명주인데 천 사이에 2㎝ 간격으로 누빈 2겹의 무명천이 들어있다. 앞쪽에는 옷을 여밀 수 있도록 매듭으로 만든 4개의 단추가 있으며 어깨에는 중앙에 가운데가 꺾일 수 있도록 경첩장식을 달아 팔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했다. 옷의 위와 아래에는 놋쇠로 만든 못을 박았고 목둘레와 소매 끝, 아랫단에는 가죽으로 단을 댔다.

정 장군의 유물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오늘날의 것과 모습이 거의 같은 장갑이다.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활을 쏠 때 낀 것으로 보이며 엄지손가락에는 뿔로 만든 깍지가 붙어 있다. 그 밖에 가죽으로 만든 혁대와 일본도와 비슷한 철제 도검, 6개의 화살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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