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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이 1975년 복원 이후 43년 만에 전면 개방된다. 영추문의 개방으로 경복궁은 남쪽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동쪽 국립민속박물관 출입구를 포함해 사방으로 드나들 수 있게 됐다. 문화재청은 6일 오전 11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지자체 관계자를 초청해 영추문 개방 기념행사를 열고 관람객 출입을 공식 허용한다. 경복궁 관리소 관계자는 "영추문 복원 이후 한시적으로 퇴장객에 한해 통행을 허락한 적은 있으나, 입장까지 허용하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영추문은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주로 출입한 문으로,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한다. 송강 정철(1536~1593)이 '관동별곡'에서 "연추문 드리다라 경회남문 바라보며 하직하고 물러나니"라고 노래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9세기 중반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지었으나, 1926년 전차 노선이 만들어진 뒤 석축(石築)이 무너지면서 철거됐고 1975년에 다시 세웠다.

영추문에는 현재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이 쓴 현판이 걸렸으며, 옛 현판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본래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자였으나, 지금은 정반대로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자이다. 조선조의 법궁인 경복궁은 출입할 수 있는 문이 공식적으로는 4개가 있었다. 남쪽의 광화문, 북쪽 신무문, 동쪽 건춘문, 그리고 서쪽의 영추문이 경복궁 동서남북을 연결하던 길목이었다. 이 가운데 서촌 인근의 영추문은 1975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이후 청와대 외곽 경호를 맡은 수경사 30경비단이 주둔하면서 통재됐고 43년의 세월 동안 공식적으로는 사람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다.

조선 건국과 동시에 경복궁이 만들어지면서 백성들은 서울의 북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창의문을 이용해야 했다. 지금의 영추문 쪽에서 효자로를 지나 세검정으로 이어지는 길은 언제나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영추문 인근은 맑은 개천이 흐르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영추문이 헐렸다고 하지만 근처의 길은 완벽히 통제되는 길은 아니었다. 비교적 자유롭게 시민들이 드나들고 전차가 다녔다. 그러던 영추문과 인근 효자로가 봉쇄된 건 단 하나의 사건 때문이다. 바로 1968년 1월 21일에 일어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 미수 사건이다.

북한의 특수 요원 31명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을 살해하기 위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했다 사살당했다. 이 사건 이후로 영추문은 봉쇄됐고 효자로는 엄격히 통제됐다. 이후 이 일대는 청와대 요새화 계획에 따라 북악 스카이웨이가 자리해 청와대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영추문도 봉쇄했다. 영추문은 문민정부인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시민의 발길이 통제되는 구역이었다. 인근 주민이 아닌 이상 거의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전해진다. 북한과 교류가 가속화되면서 엄격히 통제된 경복궁 출입문도 빗장이 풀리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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