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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평생이 순탄하기만 한 삶이 어디 있을까마는 심완구 전 울산시장 만큼 파란 많은 삶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뒤 두 번의 국회의원과 기초단체장 한 번, 광역단체장 한 번을 역임했다. 경력만을 놓고 보면 어느 누구보다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누구는 평생에 한 번이라도 하면 가문의 영광이라 할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했고, 고향에서 최고의 목민관이라 할 시장도 두 번이나 역임했다. 그러나 심 전 시장은 본인의 의욕만큼이나 많은 설화(舌禍)와 고난을 겪었다. 40대말에 국회의원 배지를 처음 달고 내리 재선을 하면서 현직 경찰서장의 뺨을 때리다 호된 국민적 지탄을 받기도 했다. 당시 정서적으로 여당 성향이 짙었던 울산 출신의 야당 의원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는 늘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또 다변의 정객답게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대중의 시선을 끌었고 국회 본회의장에서의 대정부 발언도 최다를 기록할 정도였다. 군부독재의 막바지에 이 같은 그의 야성과 돌출 행동은 정보기관의 요시찰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오랜 정치적 방학을 보냈던 그다.
 모 국회의원이 사석에서 심 전 시장의 인물평을 하면서 "그 양반은 호주머니에 돈 10만원만 있어도 남을 못줘서 애다"고 할 정도로 돈을 몰랐던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야당 의원으로서 지역구 살림살기에도 늘 빠듯한 처지에 있었으면서 어려운 지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정작 본인은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면서 술자리도 좋아했다. "세상인심을 듣는데 술자리만한 자리가 없다"는 것이 평소 그의 지론이었다. 특히 민선1기의 울산시장 재임 기간에는 역대 어느 시장들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대형 SOC사업을 벌이며 지방중소도시의 촌티를 벗게 했다. 이후 울산광역시 승격과 함께 광역단체장에 당선된 이후에는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으면서까지 울산의 지도를 바꿔 놓았다. 연어와 수달이 돌아오는 생태하천으로 거듭난 울산 태화강의 오늘도 그가 초석을 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울산의 시세에 비해 너무 과다한 의욕이라며 지지를 받지 못했던 문수축구장도 패기 하나로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남부순환도로를 비롯한 울산의 주요 도로에도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적이탈과 재임 중의 불미스런 일이 없었다면 울산의 진정한 원로로서 귀감이 되고도 남았을 그다. 뇌물죄로 복역하던 심 전 시장이 잔여형기의 형 집행을 면제받고 자유인으로 풀려나게 되었다니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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