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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이었을까?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일본이란 나라, 그 나라의 사람들은 한때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인 한국에 대해 "가깝고도 먼나라"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한일간의 새시대를 열자면서 선린 우호를 강조하며 가까운 내색을 기회 있을 때마다 내세우곤 했다. 그런 일본의 고노 외상과 아베 총리가 새파랗게 비틀어진 얼굴로 강제징용자의 배상문제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30년이 다 된 세월 저편으로 시간여행을 하게 되었다.

울산mbc에 재직할 때의 일이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가거나 희망하여 지원해가거나 부모형제를 만나러 갔다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곳에 눌러 살게 된 사람들이 고향을 떠난 지 수십년이 되도록 고향을 한번도 찾아오지 못하고 있어 이들에게 고향방문의 기회를 마련해주는 사업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사업비가 문제였다. 회사가 절반을 부담하고 나머지 경비는 스폰서를 구하기로 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경비만이 아니었다. 냉기류가 지속되는 국제적인 상황이 더 큰 문제였다. 더욱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동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을 목표했기 때문이다. 사할린은 대한항공여객기를 격주한 소련의 영토이고 동포들 역시 소련 국적이 아닌가? 서울 본사에서도 이 점을 중시하며 취지는 좋으나 워낙 거창한 사업이라 국가사업으로 해야할 일을 지방사가 하기엔 너무 벅찬 일 일것이니 신중히 숙고 하라면서 선뜻 승인을 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또한 직원들마저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표정이었다. 모 기관에 물어보았다. 경찰에도 사업내용을 알리고 자문을 부탁했다. 뜻밖에도 양측 의견은 긍정적이었다. 그 정보기관이면 만사가 해결되는 시절에 긍정적이면서 오히려 더 권장하는 해답을 받게되었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대로 밀어보기로 작심했다. 무엇보다 고향선배인 이증 사장도 나와 같은 뜻이었다. 이 사장은 본사의 분위기를 바꿔놓고 사내분위기도 되돌려놓았다.

이제 공은 나에게로 왔다. 하지만 여전히 남게 되는 경비가 문제로 남은 숙제였다. 며칠을 고심속에 빠져있을 때 구세주 같이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태화관광㈜의 이진용회장이었다. 전세항공편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갔던 나에게 전후사정을 들었던 이 회장이 사업의 취지가 좋아서 기꺼이 돕고 싶다는 것이었다. 라이온인 이 회장은 당신의 회사 외에도 계씨 이진철 사장이 회장으로 있는 국제라이온스클럽과 류석호 회장 등 울산에 있는 12개 라이온스클럽이 회사와 공동사업으로 할 것도 주선해주었다. 그 사업은 네차 례에 걸쳐 전세기가 사할린으로 가서 울산이 고향인 동포 80명씩을 실어날라 모두 320명의 동포에게 고향방문의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은 물론 열흘 간의 체류기간에 대한 일체경비를 부담하는 것이었다.

1992년 8월 21일 국제라이언스클럽의 류석호 회장, 이진철 회장, 황윤복 회장과 회사에서 박진숙 국장이 함께 사할린으로 출발했다. 대한항공 전세기는 고도 1만미터의 상공에서 시속 800킬로의 속력으로 달리고는 3시간 30분을 날아 사할린주 정청이 있는 유지노사할린소크 공항에 도착했다. 어쩐지 섬뜩해지는 러시아영토의 사할린 섬, 보이는 건물마다 음산함을 덮어쓰고 있는 것 같은 작은 도시였다. 관제탑이 가리는 쪽으로 또 하나의 비행장이 보이고 전투기가 줄지어 있는 것으로 보아 군용비행장인 것 같았다. 뒤에 알았지만 이 비행장에서 뜬 미그기가 우리의 KAL 기를 격추했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마중나온 사할린주고려인회 노인회장으로 북구 송정 출신인 박해동옹과 감격의 악수를 나누고 예약된 숙소로 갔다. 박옹은 우리일행을 맞으며 기뻐 더할 바를 몰라했지만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옆에 선 한 동포가 받으며 말했다. "이곳에 왔다가는 사람마다 한 가지씩 약속을 하고 가지만 그 약속들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공수표가 되고 맙니다 이번에도 또 속을게 아닌가?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회장님이 걱정스러운거죠." 동포들의 실상을 보고는 가여운 마음에서 돕겠다고 약속한 다음 돌아가서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일본당국은 해방이 되자 곧 한국으로 가게 한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약속한 날 설레는 마음으로 오도마리 항구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교묘하게 일본인만을 골라 태우고는 가버린채 뱃길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속고 또 속으며 한 세월을 한 많게 살아온 동포들이었다. 그 속임을 처음으로 시작한 나라가 일본이었고 그 속임에 가장 피해를 보게된 동포가 울산에서 끌려간 징용자들이었다. 오도마리 항구에 모였던 울산의 강제징용자들은 그렇게 귀국선을 놓친 다음 땅을 치며 울다가 다시 코르사코브시로 몰려가 집단부락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그곳으로 달려간 우리들은 그곳에서 고려인협회 부회장 김순금여사를 만났다. 김 여사는 북구 화봉동이 고향이었다. 9살 되는 나이에 먼저 가서 브이코프 탄광개발에 투입되었던 아버지의 초청으로 사할린에 갔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과 함께였다. 브이코프탄광 쪽에 있는 공동묘지를 가리키며 들려주던 그때의 기막힌 사연들이 지금도 귓전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도 지금쯤 살아있다면 노년이 됐을 것이다. 

문제는 사할린을 개척한 동포1세대가 거의 죽어 고혼이 되었으며 동포2세도 뒤따라 세상을 등져가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동포가 이렇듯 천형의 한을 안고 죽어간단 말인가? 지금 살아있는 그들의 후예들은 어렴풋이 들은 고국을 얼마나 와보고 싶어하고 동경하고 있을까? 밤이 되면 온가족이 붙들고 울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자리를 파고들었던 그 통한의 얼어붙은 땅에는 아직도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음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지구의 어느 한쪽에라도 우리 국민이 있다면 버리지 않겠다던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면 한많은 사할린의 동포들을 어찌 이대로 두고 있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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