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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는 날

박영식

흰 눈이 덤벙덤벙
하늘에서 내리는 날

어항 닮은 우리 동네
고기가 된 너와 나는

먹이에
입질 하느라
발이 푹푹 빠졌다

△박영식: 경남 사천 와룡 출생.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조문학 2회 추천완료. 성파시조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울산시조문학상, 한국시조문학상, 낙동강문학상 외 다수 수상. 서재 <푸른문학공간> 운영. 저서로는 『초야의 노래』 『우편실의 아침』 『사랑하는 사람아』 『가난 속의 맑은 서정』 『마트에 사는 귀신』 『자전거를 타고서』 『굽다리 접시』 등.

 

박성규 시인
박성규 시인

첫눈이 내렸다. 기별 없이 내리니 더 반가웠다. 온다고 기별이라도 주었으면 마당이라도 쓸어 놓았을 텐데 그러지 않고 내리니 아쉽기만 했다. 그래도 내리는 게 어딘가. 해 바뀌기 전에 내렸으니 반갑기 그지없는 눈이었다. 그러나 기온이 영상으로 오른 탓에 쌓이질 않았다. 온 벌판을 하얗게 쌓이도록 내렸으면 좋으련만 아쉬운 나머지 마당에서 눈을 맞는 개를 데리고 근교로 산책을 나갔다. 펄펄 내리는 눈을 맞는 기분은 이내 동심의 세계로 데려갔다.
눈이란 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릴 적에는 참으로 많이 왔다는 기억이 들었다. 고무신을 신고 눈이 쌓인 논밭을 가로질러 등하교 했었다. 체온을 머금은 발에 닿으면 금방 녹아서 신발 안이 질퍽거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때는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이 없던 시절이라 지금 생각하니 행복한 한 때였다고 기억하고 싶다.
세상을 살면서 눈만큼 좋은 표백제가 있을까? 요즘에는 세제가 발달하여 빨래나 설거지도 세제로 처리하지만 어릴 적엔 그러지도 못했으니 하얀 눈이 세상을 덮으면 마음이 저절로 깨끗해지곤 했었다. 물론 녹고 난 뒤에는 추한 모습은 남지만 저 넓은 세상을 한꺼번에 하얗게 만들어 버리는 눈은 그야말로 초강력 세제임은 분명 하렸다.
첫눈이 내리고 나니 생각나는 사람도 참 많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소식이 끊어진 사람들의 안부가 그립다.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눈의 형상도 예쁘지만 함박눈을 맞으며 산책하는 동안 이미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먹이에 입질하는 고기가 되어 있었다.
 박성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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