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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

                            류인서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촉촉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오라 했음을 알겠다

△류인서: 경북 영천 출생, 2001년 <시와 시학 등단>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아 있다』 『여우』가 있다. 육사문학상 젊은 시인(2009), 청마문학상 신인상(2010).


12월이 바쁘게 가고 있다. 불황이라 해도 가까운 사람끼리 송년의 만남은 여전하다. 봄밤을 보낸 벚꽃 진 자리에서 다시 송년의 밤을 보내며 진한 쌍화차를 앞에 두고 가는 해의 안부를 묻는 문우들과 내일의 덕담은 서로에게 위안과 위로다.

서랍을 뒤지자 낡은 엽서가 나온다. 엽서가 유행이던 시절 여행지에서 문득 보낸 사진, 잊고 있었던 설악산에서 소식을 보낸 친구의 엽서다. 그 해 설악의 단풍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계곡 물이 시원스레 흐르고 설악에서 사연을 보낸 친구의 젊은 모습이 보인다. 자주 소식 전하지 못한 눈 감은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지만 낡은 엽서에서 젊은 한 때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다. 하얗고 뽀송하던 에델바이스가 시간에 눌려 누렇게 변해 있다. 이 빠진 할머니처럼 반갑게 기다린 듯 웃고 있다.

이 겨울의 소식을 먼저 보내 보자. 멀리서 눈 소식이 있고 여기는 겨울비가 아슴아슴 내리고 있는 중이다. 겨우내 먹을 김장은 마지막 가는 이 해의 송년 선물이다. 누군가에게 가는 해 서러워 말라고 마음의 연하장을 보내고 다시 오는 해에게 안부를 물어보자. 사는 것이 바빠 서로 안부를 묻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을 좁혀 오늘 밤 멀리서는 첫 눈이 내리는 겨울밤, 너에게 나에게 한 장의 편지를 써 보자.

나와 네가 보낸 마음이 다시 돌아와 무늬 없는 봉투에선 반가운 기별이 전갈처럼 기어 나오고 세게 물릴수록 두근두근 웃음과 눈물이 따라 올 것이다. 세월의 무게만큼 그리움이 더하고 추억으로 가는 길 올해의 마지막 비가 내린다.   한영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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