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의 상흔 울산왜성·서생포왜성
아픈 역사의 상흔 울산왜성·서생포왜성
  • 강현주
  • 승인 2018.12.2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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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주 문화부 기자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7호 울산왜성, 제8호 서생포 왜성.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7호 울산왜성, 제8호 서생포 왜성.

아픈 과거의 흔적을 잊지 말라 알려주는 유적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왜군이 우리나라 동남부해안 각 지역에 쌓았던 일본식 성인 '왜성'도 그 중 하나다.

태화강 하류의 작은 구릉인 학성산에 위치하고 있는 울산의 문화재자료 제7호 울산왜성은 1597년(선조 30) 아사노 요시나가가 축성했으며, 축성 후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했다. 조선에서는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러왔다.

울산왜성은 사천왜성, 순천왜성과 더불어 왜군과 조명연합군의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1597년 12월부터 1598년 9월까지 조명연합군은 두 차례에 걸쳐 성을 포위하고 연일 공격했다. 당시 조명연합군에 포위된 왜군은 식량과 탄약이 부족해 전멸 직전까지 이르렀으며, 군마의 피와 오줌을 마시거나, 종이나 흙벽까지 끓여먹을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끝내 이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후퇴명령이 내려지자 1598년(선조 31) 11월, 성을 불태우고 일본으로 퇴각하면서 임진왜란도 막을 내렸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의 진영으로 이용됐으며, 1624(인조 2)~1654(효종 5)에는 군함을 만드는 전선창(戰船倉)을 두기도 했다. 이 성은 3단의 공간구조로 나눠져 있다. 산꼭대기에 혼마루를 두고, 본성 북쪽 아래에 니노마루를 뒀으며, 그 아래 서북쪽에 산노마루를 두었다.

세 성벽 길이의 합은 1,398m 정도며, 성벽 높이는 약 6~13m로 추정된다. 성 바깥으로 목책을 세웠고, 남쪽으로는 선착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성벽은 깬 돌을 이용해 성돌 사이 잔돌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60~70도 정도 경사지게 했으며, 성벽 모서리는 성 돌의 긴 면과 짧은 면을 맞물리게 하여 모서리를 맞춰 쌓았다. 왜군이 이 성을 쌓을 때 울산 읍성과 병영성의 성돌을 헐어 쌓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울주 서생 서생리 711 일원에 자리한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해 쌓은 일본식 성이다. 부산진을 함락시킨 왜군은 경주, 안동, 문경 등 경상도 내륙 지방 진군을 위해 이곳에 왜성을 쌓아 거점을 확보했다. 명군과 왜군의 협상이 서생포왜성에서 진행되면서 퇴각한 왜군들이 곳에서 전열을 정비했다.

정유재란 시기 제1대였던 가토의 군대가 재주둔해 조선 침략의 교두보로 활용되기도 했다. 서생포왜성은 방비를 위해 왜성을 축조할 정도로 요충지였으며, 한때 약 7,000여 명의 병사가 주둔했다.

평야지대와 산등성이를 연결해 만든 평산성인 서생포왜성은 산 정상에 본성을 두고 정상부터 평지까지 모두 3단의 공간으로 나누기도 하며, 크게는 내성·외성 공간으로 나눠진다. 1593년 성을 쌓을 당시 출입문은 모두 11곳이며, 출입문은 입구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입구 형태를 사각형의 내외옹성형, 엇갈림형, 직선형 등으로 만들고, 바깥에서 안쪽으로 볼 수 없도록 했다.

본성에는 동서로 성벽을 둘렀고, 내부에는 평지가 조성돼 있다. 성벽 곳곳에는 원래 출입구를 폐쇄하거나 성벽을 내어 달았던 흔적이 확인된다. 혼마루의 서쪽으로 치우쳐진 곳에 천수각터가 남아있다. 성 내부는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충신들의 배향을 위해 창표당(蒼表堂)을 세웠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1895년까지 약 300년 동안 조선 수군의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으로 사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