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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잦은 연말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최근 들어 그렇게 열띤 토론에 끼어 본 적이 없었다. 과거 한솥밥 먹던 선배-후배-동료 기자, 언론인들과 함께 했던 술 자리에서였다. 좋은 프로그램으로 큰 언론상을 곧잘 받아내던 방송국 피디 선배와 동료였던 기자, 어느새 중앙지 중견기자가 된 후배기자, 신문사 편집방향을 정하는 간부기자, 이제는 나이를 먹어 신문 경영과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선배기자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언론바닥을 떠나 교육계로 밥 빌어먹는 자리를 옮긴 불순분자가 끼어서 그런지, 모처럼 만난 반가운 인사치레도 잠시,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는 교육으로 옮겨 붙었다. 그리고, 기자 언론인들이 교육에 그렇게 지대한 관심과 큰 기대를 가지고 교육계 내부를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고 있을 줄 미처 몰랐다. 

먼저, 기대감. 흔히 이야기하는 '수구보수꼴통'들 차지였던 울산교육에도 진보 교육권력이 나왔으니, 이제는 달라져도 대단히 많이 달려져야 한다는 걸로 말문들을 열었다. 그 기대감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것이 아니고,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법 규정과 교육감 권한이 어떤지는 몰라도 우리 울산에서만이라도, 유명무실해진 음악, 체육, 미술수업을 필수교과로 만들고, 동서양 고전 50권-아름다운 시 100편 정도는 그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도록 가르쳐 보자는 것이다. 고전과 시 속에서 인생의 방향과 진리를 찾을 수 있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을 읽어 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자신의 삶을 짊어지고 공동체에 책임감을 갖는 진정한 인재 교육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들의 평생에 한이 되는 영어는 회화 300문장 정도를 달달달 외우고 못쓰면 진급이 안되도록 실용교육을 한번 해봄직도 하다고 했다. 시키자니 돈이 많이 들고, 안 시키자니 뒤처지는 것 같은 영어 과외 안해서 좋고, 모두가 학자나 외교관이 되지 않을 바엔 외국인과 떠듬떠듬 이야기 나눌 정도면 영어교육은 충분조건을 갖춘 셈이라는 것이다. 특히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는 기자 언론인들은 이런 교육을 무한 지지했다. 아이 한 사람 한 사람이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과 되고 싶은 소망에 따라 무한히 뻗어나가고 성숙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회를 제공하는게 교육이라고 떠들면서, 이를 뒷받침할 문학이나 음악, 미술, 체육교육은 내팽개치는 게 과연 교육자가 할 짓인가 하는 비분강개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야기 주제는 교육의 본질로 흘렀고, 지금 우리 교육은 파쇼고, 전체주의라는데 대체로 공감했다.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에 바람직한 인간상을 만들어 내는 게 파쇼고 전체주의라면, 국가나 특정이념을 위해 정해놓은 하나의 정체성에 모든 사람을 묶어두려는 수단에 머물러 있는 우리 학교와 교육현실은 백번 파쇼고, 천번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시쳇말로, 산업시대 대량생산 체제를 뒷받침할 표준화되고 단일화된 노동력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시스템으로서의 학교교육에서 우리가 단 한 발짝이라도 나간 적이 있느냐고 이죽거렸다. 현장 기자생활만 25년, 이제는 논설을 쓰는 한 선배기자는 심지어, 교육도 지방자치시대라는데 교육권력도 바꿨겠다, 이 참에 교육판을 한 번 확 갈아 엎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고 말 안줏거리를 던지기도 했다. 꽤 맞는 말 같기도 했다.

막걸리 몇 순배가 더 돌자, 마키아벨리도 나왔고, 막스 베버도 나왔다. 변화가 간절하지만, 그래도 쉽게 바뀌겠느냐는 것이다. 시작도 어렵지만 성공하기는 더 어려운 게 새로운 질서(체제)라는 마키아벨리를 빌리지 않아도 되었다. 옛 질서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신질서에 대한 적대감을 극복하고, 새 질서에서 이익을 누릴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 낼 현실적인 노력들을 아직 찾기 힘든 게 울산교육이라는 것이다. 확실한 결과를 보기 전에는 어떠한 개혁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있느냐면서, 교육청 공무원인 건 맞지만 미관말직에도 못 미치는 애먼 필자만 다그쳤고 처음부터 묵묵히 듣고 있던 나는 그저 입맛만 쩝쩝 다셨다. 무서운 말은 또 있었다. 그동안 선출 교육감들에게 매번 걸었던 기대가 실망으로 끝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던 기억 때문인지, 술에 취해 내뱉던 옛 동료기자의 말은 지금도 먹먹하다. "옛날에 막스 베버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 열정의 광풍이 지나고 난 뒤에는 전통적인 일상이 다시 찾아온다. 신념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한 번 지배층이 되고 나면 매우 쉽사리 평범한 봉급자층으로 전락하고 마는 게 현실이다. 명심해라" 명심하고 말 것도 없이, 나하고는 별 상관없는 말이지만 지금도 귀에 맴돈다. 기자들 술자리가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빈 소주병과 막걸리 통들이 나뒹굴고, 술에 -혹은 잠에, 혹은 고단한 일상에, 혹은 울분에- 못 이겨 술 상위로 한 두명씩 엎어지기 시작하면서 술자리는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이런 술 자리, 실로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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