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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시인: 1926년 8월 15일~1956년 3월 20일(향년 29세), 강원도 인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1946년 '거리'등단. 경향신문 기자, 동인그룹 '후반기'회원,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박인환 시선집』,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
 

박진한 시인
박진한 시인

201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 해 시작의 시(詩)를 열어봅니다. 무엇인가 혼란스러운 것들이 정리되었으면 하는 새해이기도 합니다. 정리된다는 것이 제자리에 있는 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활기차고 자유분방하게 새로운 것을 탐험하고 창조하는 동적인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저는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요절 박인환 시인의 시 '세월이 가면'을 평한다기보다 지면에서 여러분과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서 저의 느낌을 조금 가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가슴 속 그 사람, 있지만 없는 그 사람을 '그립다' '보고 싶다'는 표현보다 오히려 자신의 이런 상태를 동정으로 표시한 감상주의로 쉽지만  다소 어려운 시 같습니다.


이 시를 쓰게 된 그 날을 들여다보면 더욱더 간단 복잡합니다. 어느 술집에서 밀린 외상값을 갚으라는 요구에 술집 주인의 아픔과 자신의 아픔을 동일 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니 다소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며 관습이나 규율 등을 무시하는 보헤미안적 표현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비록 외상술을 마시지만 언젠가는 꼭 갚겠다는 이해요구적이며, 당신과 나는 같은 아픔이 있지 않으냐의 사실주의적 표현일까요.
쉬운 시에 아픔을 꼬아 넣은 꽈배기 같은 느낌이 있는 살짝 모더니즘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당시 이 시는 노래가 되어 서울 바닥을 휩쓸었다고 하니 오늘에서 보면 생활이 어렵지만 흥겹고 공감되는 축복의 시 노래 하나 있었으면 바람으로 여러분과 함께 한 해를 출발해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박진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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